야구선수, 특히 타자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다. 많은 은퇴 선수들이 “나이가 들면서 눈이 점점 안 좋아지고, 공이 잘 안 보이면서 야구를 그만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토로할 정도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아예 시각 기능 전문의를 고용해 몸값 비싼 소속 선수들의 눈을 직접 관리하기도 한다. 좋은 타격은 공을 ‘잘 보는’ 단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 ‘눈 깜짝할 사이’ 타구 판단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는 18.44m. 공 하나가 투수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를 지나치는 시간은 시속 150㎞를 기준으로 했을 때 0.3초, 시속 135㎞를 기준으로 했을 때 0.4초밖에 안 걸린다. 단어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다. 그 찰나에 타자는 상대 투수의 구종과 코스를 가려내고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를 판단해, 배트를 휘두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0.1초 안에 보고, 0.1초 안에 판단하고, 0.1초간 타격해야 한다는 의미다. 눈의 순발력을 좌우하는 동체시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실제로 수많은 레전드 타자들은 탁월한 동체시력으로 일찌감치 유명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타자인 삼성 이승엽이 바로 그렇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은퇴 2년 전인 1997년 STC(삼성 트레이닝 센터)에서 이승엽의 눈을 보고 감탄한 기억이 있다. 류 감독은 “그때 선수단 전체가 체력테스트를 했다. 팔과 다리의 근력, 러닝 후 체력 회복 속도 등 여러 가지 항목을 체크하는데, 그 가운데 동체시력 검사가 포함됐다”며 “빠르게 움직이는 숫자 9개를 연이어 보고 어떤 숫자가 있는지 읽어내는 방식이었다. 나는 3개 정도만 맞혔는데, 승엽이는 상당수를 정확하게 봤다.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물론 이승엽은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20대 초반의 선수였고, 류 감독은 은퇴를 앞둔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그 점을 고려해도 이승엽의 동체시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는 것이 류 감독의 기억이다. 실제로 당시 삼성스포츠과학지원실 자료에 따르면, 이승엽은 동체시력 테스트에서 0.1초 후에 사라지는 9자리 숫자를 6자리까지 놓치지 않고 읽었다. 일반인 평균이 3자리였으니 그보다 두 배 많은 수치. 야구 선수들 가운데서도 최상위권이었다.
# ‘매의 눈’ 이승엽·추신수·양준혁
삼성 출신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현역 시절 이승엽과 함께 최상급 동체시력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텍사스 추신수도 ‘매의 눈’을 가진 선수로 유명하다. 스스로도 빅 리그에서 살아남은 비결 가운데 하나로 ‘동체시력’을 꼽았을 정도다. 추신수의 출루율이 높은 이유 역시 나쁜 공을 잘 골라내는 눈 덕분이다. 추신수는 스프링캠프에서 타격 훈련을 하기 전에 실내연습장을 먼저 찾는다. 특수한 배팅 기계에서 나오는 시속 200㎞짜리 테니스공을 끊임없이 본다. 빠른 볼에 대한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테니스공을 ‘치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 공에 적힌 숫자를 읽어내는 데 주력한다. 에드거 마르티네스(전 시애틀) 같은 최고의 타자들이 즐겨 했던 훈련 방법이다. 추신수도 마르티네스처럼 볼의 궤적을 따라 숫자를 눈에 담는 훈련을 하면서 선구안을 더 키웠다. 본격적으로 커리어의 꽃을 피운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애용했던 훈련법이라고 한다. 신시내티 소속일 때는 잠시 이 훈련을 쉬었지만, 텍사스로 팀을 옮긴 뒤 다시 시작했다. 필요성을 느껴서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양쪽 눈 시력이 모두 2.0이었다. 그만큼 탁월한 눈을 타고 났다. 현역 시절 한창 타격감이 좋을 때는 “날아오는 야구공에 찍혀 있는 ‘한국야구위원회’라는 글자까지 다 보였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삼성 출신인 양 위원 역시 STC에서 이승엽과 같은 시력 테스트를 받았고, 최상급 동체시력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양 위원의 취미는 낚시인데, 눈의 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낚시대를 드리운 뒤 움직이는 찌에 눈을 고정 시키고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훈련도 스스로 했다고 한다. 취미 생활을 할 때도 야구에 도움이 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선구안의 최고수가 된 비결이다.
# 베테랑들의 시력 저하 극복법
노화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아무리 눈에 좋은 음식을 먹고 영양제를 섭취해도 나이가 들면 시력 저하를 막을 수 없다. 오 사다하루(요미우리), 오치아이 히로미쓰(주니치)처럼 일본 프로야구를 주름잡은 명 타자들도 훗날 “시력 감퇴가 은퇴의 주된 이유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동체시력이 떨어지면 타격뿐만 아니라 수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움직이는 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보는 능력도 동체시력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플라이 타구를 잘 처리하려면 하늘에 떠 있는 공을 계속 바라보면서 타구 방향을 제대로 쫓아가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바람이나 비의 영향 탓에 공이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날아갈 때는 더 그렇다. 날아오는 공의 주변공간까지 동시에 볼 수 있는 주변시력까지 갖춰지면 최상급 동체시력. 그러나 나이를 한 살씩 먹을 때마다 이 능력들이 조금씩 감소한다.
결국 젊은 눈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는 게 답이다. 요미우리에서 ‘검객’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한국계 선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는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던 2008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역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동체시력의 약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오가사와라는 경기 전 인터뷰를 할 때도 카메라 플래시가 직접 눈에 닿지 않도록 최대한 피했다고 한다. 플래시로 인한 잔상이 눈에 남으면 경기 때 구종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타격에 방해가 되는 작은 변수라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동양인 메이저리거의 새 역사를 썼던 스즈키 이치로(마이애미)도 그랬다. 이치로는 동체시력이 뛰어난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동체시력을 발달시키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판을 빠르게 읽고 숫자를 더하는 훈련을 계속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이치로도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체적으로는 아직 젊은 선수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지만, 시각적인 능력의 감퇴가 타격 실력의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고 종종 털어 놓게 됐다. 이치로는 시력 감퇴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앞서 언급한 추신수처럼 고속으로 발사되는 테니스공에 적힌 숫자를 읽어 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흔을 훌쩍 넘겨서도 현역 생활을 이어갔던 한신의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아예 동체시력 유지를 위해 안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0안타를 치고 은퇴한 전준호 NC 코치 역시 시력 관리를 잘한 덕분에 마흔 넘어서까지 꾸준히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전 코치는 일부러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먼 산을 보는 연습을 하거나, 눈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녹색을 자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시력 체크도 1년에 3~4회씩 하면서 신경을 많이 썼다. 전 코치는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도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의 궤적을 눈으로 동시에 좇는 연습을 많이 했다. 동체시력이 나빠지면 타자는 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국내 구단들도 동체시력 훈련 장비 도입
송진우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2010년 일본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2군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이때 경험한 생소한 문화 하나가 바로 ‘비전 트레이닝’이었다. 요미우리는 2군 숙소에 있는 트레이닝 시설에서 한 시즌에 두 번씩 선수 전원의 눈 운동 능력을 체크하고 보고서를 만들었다. 숙소에 살지 않는 선수들까지 모두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요미우리가 그만큼 선수들의 눈 관리에 철저했다는 이유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선수들에게 ‘눈 관리’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KIA 고참 시절, 한밤중에 이동하는 구단 버스 안에서 젊은 선수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 위원은 곧바로 선수들에게서 스마트폰을 압수했다가 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돌려줬다. 스마트폰을 보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어두컴컴한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이 뿜는 불빛을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의 피로가 가중된다는 이유에서다. 삼성 선수들도 한때 류 감독의 권유에 따라 원정경기 숙소에 휴대전화를 두고 야구장에 나오기도 했다. 이유는 역시 같았다. 훈련으로 동체시력을 향상시키기 이전에 일상생활에서부터 눈을 보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이제 국내 구단들도 체계적인 시각 훈련 방식을 도입했다. 두산은 지난해 일본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지인 기요다케 구장에 ‘슈프림 비전(Supreme Vision)’이라는 기계를 갖다 놨다. 야수들이 훈련 틈틈이 사용할 수 있게 본부석 입구에 비치했다. 이용 방식은 간단하다. 선수가 기계 앞에 서서 시작 버튼을 누르면, 터치패드에 1부터 10까지의 숫자 열 개가 임의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순서대로 숫자를 빠르게 누르면 한 게임이 끝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터치패드를 찍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 기계가 바로 동체시력 훈련을 위한 장비였다. 선수들이 훈련장을 오가면서 수시로 동체시력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 것이다. 실제로 선수들은 “처음에는 숫자를 찍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하면 할수록 움직이는 숫자가 눈에 익어서 적응하기 쉬워졌다”고 호평했다. 두산이 기대했던 바로 그 효과다.
한화는 처음으로 일본 캠프지가 아닌 홈구장에서 스포츠 비전 스크리닝을 실시한 구단이다. 스포츠 비전 스크리닝 전문 업체의 도움을 받아, 요미우리처럼 한 시즌에 두 차례 선수 전원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스포츠 비전 스크리닝은 선수가 경기할 때 사용하는 시각 기능을 측정하고 분석해 야구선수의 선구안이나 순간 판단 능력 등을 향상시키는 시각 검사다. 동체시력과 정지시력을 비롯해 총 아홉 가지 항목을 검사했다. 선수들의 시력을 보호하고 훈련시키는 방법도 이렇게 점점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만큼 ‘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라식수술’ 투수는 권장, 타자는 조심 까닭은… 삼성에서 은퇴한 심정수는 라식수술 이후 야간경기에서 빛이 번져 보이는 부작용을 겪었다. 이종현 기자 워싱턴의 천재 타자 브라이스 하퍼는 2011년 마이너리그에서 극심한 타격 부진을 겪었다. 원인을 찾던 구단은 하퍼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검진을 한 안과 의사는 “이런 눈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야구를 해왔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본 야구 선수 가운데 시력이 최악”이라고 했다. 하퍼는 곧바로 콘택트렌즈를 맞췄다. 렌즈를 처음 착용한 뒤에는 “마치 세상을 HD 화면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하퍼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로 성장했다. 야구선수에게 시력 교정은 이렇게 필수적이다. 안경이든, 콘택트렌즈든, 스스로에게 맞는 시력 교정 방법을 찾아낸 뒤 야구를 더 잘하게 된 선수들이 많다.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후루타 아쓰야도 그런 케이스다. 심지어 그는 ‘안경을 쓴 포수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까지 깼다. LG 박용택은 양쪽 시력이 0.9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지만, 야간경기에서 시력을 더 높이기 위해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한 투자였다. KIA 양현종은 아예 자신의 시력에 맞게 도수를 조절한 고글을 착용하고 마운드에 오른다. 고글을 고정시키는 검정색 끈은 이제 양현종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SK 김광현도 몇 년 전 “야간 경기에서 포수의 사인을 더 잘 보고 싶다”며 안경을 쓰고 마운드에 오른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안경과 콘택트렌즈는 불편한 점이 많다. 안경은 여름에 땀을 흘릴 때마다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만에 하나 공에 맞았을 때 큰 부상의 위험이 있다. 콘택트렌즈가 편하기는 하지만, 안구건조증이 있는 선수에게는 더 큰 괴로움을 안긴다. 그러나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는 선수들은 “시력 교정으로 인한 경기력 향상 효과가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크다”고 입을 모은다. 언젠가부터 아예 라식이나 라섹과 같은 시력 교정 수술을 받는 선수들도 늘었다. 지금은 은퇴한 kt 장성호, 롯데 조성환 등이 라식 수술을 받고 새로운 시야를 찾게 된 대표적 선수들이다. 그러나 삼성에서 은퇴한 심정수처럼 라식 수술 이후 야간 경기에서 빛이 번져 보이는 부작용을 겪은 선수들도 있다. 심정수는 결국 특수 제작 안경을 착용한 뒤에야 정상적인 타격을 할 수 있게 됐다. 여전히 선수들이 시력 교정술을 조심스러워 하는 이유다. 김경문 NC 감독은 “투수는 라식 수술을 적극 권장할 만하지만, 타자들은 (심정수와 같은 사례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