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지난해 강원도 철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동안 딸을 찾는 데 가산을 모두 썼다. 남은 게 없었다. 집을 옮겨야만 했다. 동시에 딸의 흔적을 집 깊은 곳에 숨겼다. 이제 눈에 닿는 것이라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전부다.
둘이 있을 땐 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딸을 생각하고, 눈을 뜨면 딸을 찾는 서로를 본 이후부터다. 아내는 참을 수 없이 딸을 보고 싶을 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 때문에 우는 남편을 보면서 울음을 그쳤다. 머리가 희끗해진 부부는 그렇게 눈물 닦는 법을 새로 배웠다. 보고 싶단 말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억지로 그리운 사람을 가슴에 담는 법을 익혔다.
남편은 한숨과 함께 후회를 뱉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해는 떴고, 하루의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유난히 딸을 보러 가자고 보채는 아내의 모습만 달랐을 뿐이다.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이날도 “지난주에 보고 왔으니 다음에 가자”며 아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날 전주로 내려갔다면, 전화라도 한 통 했다면, 지금과는 분명 달랐을 거라고 자책한다.
딸이 사라졌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날’ 이후, 부부는 딸의 실종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딸이 사라진 현장에서부터 거꾸로 사건을 따라갔다. 그리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정황들을 하나씩 발견했다.
2006년 사라진 이윤희 씨의 과거 모습과 사례금 1억 원을 내건 전단지.
“여보, 윤희가 어딜 갔는지 없어졌다고, 신고가… 연락도 안되고….”
사라진 딸의 아버지 이동세 씨(78)는 회사에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린 건 지난 2006년 6월 8일 오후다. 아내의 전화였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락두절, 딸, 실종신고, 학교,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만 귀에 박혔다. 이 씨는 ‘별 일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그렇게 믿으면서 전주로 향했다.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 딸 이윤희 씨(당시 29세)는 서울의 한 여대에서 통계학과 미술을 전공하다 오직 ‘동물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전북대 수의학과에 편입했다. 앞서의 전화를 받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걱정 반, 우려 반으로 딸을 바라보는 부모를 안심시키려 “졸업과 동시에 동물병원을 운영하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말하는 기특한 딸이었다.
편입한 학교에서도 적응이 빨랐다. 나이 어린 동기들과 허물없이 지냈고, 모임을 주도적으로 열기도 했다. 당시 이 씨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한 동기는 기자와 만나 “활발하고 야무진 성격에 인기가 많았다. 편입하고 두 번째 학기부터는 장학금을 받았다. 여러모로 부러운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했다. 집과 학교, 어느 곳에서도 이 씨가 말 없이 사라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 새벽의 비밀
지난 2006년 6월 5일 저녁, 전북대 앞 대학로의 한 맥줏집에서 수의학과 종강모임이 열렸다. 교수와 학과동료 4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고조됐고, 모임은 다음날 새벽 2시를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이 씨는 모임이 끝날 무렵인 이날 새벽 2시 30분 맥줏집을 나섰고, 1.5㎞ 떨어진 자신의 원룸으로 향했다. 이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씨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틀 뒤, 동기들에 의해 밝혀졌다. 지난 2006년 6월 8일 오후, 이 씨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자 동기들이 원룸을 찾았다. 현관은 잠겨 있었다. 이 씨가 키우던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알지 못했던 동기들은 119와 지구대 등에 신고해 협조를 얻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외출할 땐 늘 베란다에 묶어놓았던 강아지가 풀려 있었다. 배고픈 강아지들이 쓰레기통을 뒤진 데다 배설물까지 뒤섞여 방 안은 난장판이 돼 있었다.
당시 출동한 경찰은 단순 가출 정도로 판단했다. 현장에서 범죄에 연루된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과 동기들 등에는 특별한 연락이나 단 한 통의 협박전화도 없었다. 몸싸움 흔적도 없었고,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둔 현금 50만 원도 집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씨의 친언니가 방 안에 설치된 컴퓨터를 들여다보면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이 씨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 2006년 6월 6일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검색창에는 ‘112’와 ‘성추행’이라는 단어가 검색됐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이 씨의 동기가 즉시 컴퓨터 조작 시간을 확인했다. 112와 성추행 단어 검색은 6일 새벽 2시 58분에 시작돼 3시 1분에 끝났다. 1시간 20분이 지난 4시 21분에는 컴퓨터 메인 스위치가 수동조작에 의해 꺼졌다.
이 씨의 가족들은 곧바로 ‘범죄피해’를 떠올렸다. 앞서 지난 2006년 6월 2일, 이 씨는 학교 인근에서 휴대전화와 지갑 등이 들어있는 가방을 날치기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이 씨는 휴대폰이 없었다. 동시에 이 씨가 ‘자의적’ 외출과는 관계가 없다는 정황들도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씨의 외출복 가운데 종강파티 때 입었던 옷을 제외하면 모두 그대로 남아있었다.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집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얇은 옷과 속옷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 증발
이 씨의 가족들이 앞서의 정황을 경찰에 알리자, 경찰 역시 ‘사건’으로 판단해 수사에 나섰다. 그런데 실종 나흘째인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소재의 한 호텔에서 누군가 이 씨의 계정으로 인터넷 메일과 음악사이트를 접속한 사실도 포착됐다. 경찰은 통신업체가 가입자의 메일을 무단확인하지 못하고, 비밀번호 없이는 다른 개인의 편지함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토대로 이 씨나 이 씨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제3의 인물이 인터넷 메일에 접속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즉시 해당 호텔의 CCTV를 판독했지만 이 씨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초기 수사가 답보 상태에 빠지자 경찰은 특별 전담 수사팀을 편성했다. 전북 15개 경찰서와 지구대에 근무하는 경찰관 가운데 가용 인력 등 연인원 1만 5000여 명도 투입됐다. 총 16회에 걸쳐 이 씨가 실종된 전북대와 전주 덕진동 건지산 일대 야산, 폐가 및 공사 중단 건축현장, 기도원 등 숙식이 가능한 합숙시설 등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 씨 사진을 담은 전단지 3만여 장과 현수막도 제작해 도내 전역에 배포하고 제보를 기다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수사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지난 2007년 초에는 한 통의 전화가 이 씨 언니에게 걸려왔다. 전화를 건 김 아무개 씨(당시 27세)는 “(윤희가) 전화할 형편이 안 돼 대신 전화해 달라고 해서 연락했다”면서 “윤희는 힘들어 하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발신지 추적을 통해 전화를 건 곳이 광주시내 공중전화 부스임을 확인하고 수사대를 급파했다. 인근 CCTV를 분석해 김 씨를 찾아냈지만, 그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심령술사도 나타났다. 경찰서를 찾아온 40대의 심령술사는 이 씨가 지하 상하수도 시설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그와 함께 원룸 근처 상하수도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허사였다.
경찰은 이 씨 실종사건 수사가 답보상태였던 이유를 이 씨 동선을 찾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당시 수사를 지원했던 전북 경찰 관계자는 “당시 원룸 주변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한 대가 있었지만 작동되지 않았다. 실종시간도 늦은 새벽이라 목격자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 인물 역시 참고인으로 불러 한 사람당 6~7회 조사했다. 범죄에 연루돼 있다면 보통 이쯤에서 허점이 나오는데, 이 씨 주변 인물들에게선 특별한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수상한 남자
그런데 경찰 수사와 별개로 이 씨를 찾던 가족들은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다. 같은 과 동기 A 씨였다. 학과 동기의 증언과 경찰 수사 과정에서 A 씨는 그동안 이 씨를 짝사랑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씨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최종 목격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씨가 앞서의 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실종되기 전까지의 모든 상황은 A 씨의 진술만으로 구성됐다. A 씨는 회식장소에서도 이 씨의 옆자리에 앉았고, 이 씨가 원룸을 향해 맥주집을 나설 때도 혼자 따라 나갔기 때문이다.
당시 A 씨는 경찰 진술에서 “이 씨가 ‘이제 (모임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지?’라고 묻더니, 갑자기 가져온 가방을 놓고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방을 챙겨 뒤따라갔고, 함께 10분가량 걸어 원룸 앞 삼거리에 도착했다”며 “멀진 않지만 그곳에서부터 집 방향이 달라 이 씨가 ‘여기서 헤어지자’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이 씨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가는 척하다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고, 이후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이윤희 씨의 마지막 목격자인 A 씨의 진술을 토대로 이윤희 씨의 아버지가 그린 약도.
# 전(前)과 다른 사람
A 씨의 태도가 이 씨 실종 이후로 백팔십도 달라졌다는 점도 수상했다. A 씨는 그동안 이 씨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해왔다. 또 다른 학과 동기는 이 씨 아버지에게 “A 씨는 늘 이 씨를 따라다녔다. 어딜 가든 이 씨와 함께하려 했다. 자신이 듣지 않아도 되는 수업에도 이 씨가 수강 신청을 하면 따라 신청했다. 질투도 심했다. 이 씨가 다른 남자와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남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느냐’며 따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앞서의 동기는 놀라운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A 씨의 원룸에 놀러 갔다가 이 씨의 소지품을 발견했다. 동기들과 이 씨에게 알렸고, 이후 A 씨의 집에 놀러가는 척 방문해 ‘손님 왔으니 먹을 것 좀 사오라’고 내보낸 뒤 집 안을 뒤졌다. 책상 한 구석에서 발견한 A 씨의 다이어리에서 이 씨의 외모와 옷차림에 대해 매일 기록한 일기와 이 씨 머리카락 등이 나왔다”고 전했다. 이날 이 씨는 다이어리를 A 씨 몰래 들고 나왔고, 이를 본가에 가져가 부모와 언니에게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실종 이후 경찰 역시 해당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 씨 실종 이후 A 씨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이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던 그가 소극적으로 변한 것. 지난 2006년 6월 8일, 동기들이 이 씨의 행방을 찾기 위해 처음 원룸에 방문했을 때, A 씨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당시 동기들은 비밀번호를 몰라 119와 경찰에 신고해 현관문을 열었지만, A 씨는 사실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종 한 달 전 이 씨가 남양주 본가에 가 있을 때, 또 다른 동기가 이 씨 원룸에서 빌릴 물건이 있었고 A 씨에게 부탁해 해당 물건을 꺼내줬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동기들은 경찰에 “A 씨는 우리가 비밀번호를 유추하고 119 대원들이 문을 부술 때, 팔짱을 끼고 멀찍이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여기에 A 씨는 이미 6일 오전부터 이 씨의 행방이 묘연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정황도 드러났다. 날치기로 인해 핸드폰이 없었던 이 씨에게 학과 조교가 남는 휴대폰을 6일 오전에 주기로 약속했던 것. 이 사실마저도 알고 있었던 A 씨는 6일 오전 학과 조교에게 전화를 걸어 이 씨가 핸드폰을 찾아갔는지 물었다. 조교가 “(이 씨가) 온다고 하더니 연락도 없다”고 대답하자, A 씨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또한 이 씨는 지난 2006년 6월 7일, 졸업을 위해 꼭 수강해야 할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다. 함께 수강하고 있던 A 씨 역시 학교에 오지 않았다. 평소 수업을 빠지지 않았던 둘에겐 특이한 일이었다. A 씨는 7일 오후 학교에 나타났으나, 8일까지 이 씨를 찾거나 연락을 시도한 정황은 없다. 이 씨의 가족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 씨를 따라다니던 A 씨의 행동이 크게 변했다고 의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씨의 아버지는 “수상한 정황은 더 있다. 앞서 A 씨가 회식장소에서 이 씨를 따라 나오며 챙겨 나왔다고 증언한 가방이 집 안에서 발견됐다. 회식 장소에서 출발한 시각과 인터넷 접속 시각에서도 의문이 든다. 원룸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인데, 새벽 2시 10분에 출발한 딸이 2시 58분에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라며 ”6월 8일 경찰이 보고를 위해 현장을 떠났을 때 학과 동기와 함께 이 씨 방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동안 A 씨를 찾아 수차례 물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정황만 있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용의자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당시 A 씨는 피의자 신분이 아닌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실종 이후부터 수년간 다양한 수사기법을 동원해 범죄를 입증하려 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A 씨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이윤희 씨가 거주하던 원룸 앞 삼거리. 지금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다.
# 오늘도 딸은 오지 않았다
이 씨의 아버지는 딸이 사라진 후 모든 관심을 딸의 행방에 집중했다. 모든 일을 놓고 딸의 원룸에서만 4년을 지내기도 했다. 현상금 1억 원을 걸고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고 관련단체 협조를 요청하는가 하면, 네티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여전히 딸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 씨의 아버지는 “시간이 이만큼 지나고 나니까, 어디선가 딸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사만큼은 꼭 확인하고 싶다”며 말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A 씨를 무조건 용의자로 몰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A 씨는 그날 새벽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지금이라도 솔직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A 씨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경찰에 모두 이야기 했다”고 전했다.
전주 덕진경찰서 여성청소년수사팀은 지난 3월 이 씨 실종사건에 대해 재수사에 나섰다. 이 씨 아버지에게 경찰 재수사 사실을 알렸지만 반기는 표정은 비추지 않았다. 지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딸은,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