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오른쪽)이 3번기로 치러진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원성진 9단을 2-0으로 누르고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이세돌, 알파고가 빙의했나
딱 한번만 더 이기고 싶다던 알파고와의 5국이 3월 15일 끝났다. 그 후 보름간 제주도 등지에서 휴식을 취한 이세돌은 보름 후 다시 인간계로 복귀한다.
첫 무대는 맥심커피배 8강전이었다. 상대는 후배 김지석 9단. 힘이 좋고 펀치력이 강한 그는 껄끄러운 상대다. 상대전적에서 13승 9패로 앞서 있지만 김지석이 입단한 초반에 승수를 많이 쌓았을 뿐 최근 7번의 성적만 놓고 보면 1승 6패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돌은 마치 전성기 슈가레이 레너드를 연상케 하는 현란한 스텝과 펀치로 김지석을 무장해제시켰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이세돌은 1회전에서 미국의 앤디 리를 상대로 가볍게 몸을 풀더니, 2회전에서는 한국의 나현을 꺾은 대만의 복병 린리샹을 제압하고 8강에 올랐다.
8강전에 오른 이세돌의 다음 상대는 올해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자 강동윤. 하지만 강동윤도 알파고를 경험한 이세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세돌이나 강동윤이나 그동안 응씨배와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올해 응씨배는 이세돌 쪽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국내로 다시 돌아온 이세돌을 맞은 상대는 맥심커피배 준결승전의 박영훈이었다. 꾸준한 박영훈은 웬만한 중국 기사들보다 까다로운 상대. 하지만 박영훈도 절정의 이세돌을 막지 못하고 결승진출을 지켜봐야만 했다.
최근 이세돌의 7연승에 대해 바둑계에서는 ‘알파고와의 대결을 통해 이세돌이 바둑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이세돌 9단이 전성기는 지났지만 과거에 비해 기량이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면서 집중력도 동반 하락한 것인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알파고와의 대국이 그의 식었던 바둑에 대한 열정을 깨운 것 같아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그는 “사실 이세돌은 라이벌 구리와의 10번기에서 승리한 이후 목표를 상실한 듯 보였어요. 이후 커제와 자주 대결했지만 커제는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의욕이 안 생기죠. 커제가 그렇게 이세돌을 도발했어도 상대를 안 해주잖아요. 그런데 알파고는 얘기가 달라요. 알파고와의 대국을 통해 새로운 바둑의 세계를 봤고, 기존의 바둑 이론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자신이 온몸으로 체득했잖아요. 아마 바둑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고 봅니다.”
#다음 목표는 바둑올림픽 응씨배
마침 되살아난 바둑 열정에 기름 역할을 할 목표도 생겼다. 바로 바둑올림픽 응씨배다. 응씨배는 1989년 조훈현 9단이 첫 대회 우승을 차지한 이래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최철한이 차례로 정상에 오르며 ‘응씨배 우승자가 한국 바둑의 법통을 잇는다’라는 말까지 낳은 유서 깊은 기전이다.
그런데 세계타이틀 18회 보유자 이세돌 9단이 응씨배 우승 경험이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알파고와 대결 후 응씨배 4강에 올랐다. 응씨배 출전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이다.
본인 역시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세돌은 맥심커피배 우승 뒤 가진 인터뷰에서 “이제 나이도 있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래도 경쟁이 치열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마지막 응씨배란 각오로 도전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이세돌의 응씨배 준결승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후배 박정환 9단이다. 박정환은 현재 30개월 연속 국내랭킹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다. 하지만 이세돌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다. 박정환과의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세돌은 박정환과 통산 27합을 겨뤘는데 17승 10패로 앞서고 있다. 올해 초 열린 명인전 결승전에서도 3-1로 승리한 바 있다. 박정환도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기사로 이세돌 9단을 꼽은 바 있다.
준결승전을 넘어서면 결승전은 차라리 쉽다. 반대편 조에서는 중국의 스웨와 탕웨이싱이 맞붙는다. 그 대결의 승자가 이세돌-박정환 전의 승자와 결승5번기를 벌인다. 둘 다 강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커제와는 달리 내리막길의 기사들이어서 이세돌-박정환 전의 승자가 우승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3번기로 열리는 응씨배 준결승전은 오는 6월, 결승5번기는 8월(결승 1∼2국)과 10월(결승 3∼5국)에 열릴 예정이다. 준결승과 결승전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