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대중지 <주간겐다이>는 재일3세 박일(朴一) 오사카시립대학 교수의 기고글을 통해 전후 일본을 들썩이게 한 스포츠·예능계의 재일한국인 스타를 집중 조명했다. 일본의 국민배우, 미녀스타, 전설의 프로레슬러로 등극했지만 떳떳하게 한국인임을 밝힐 수 없었던 그들의 사연을 공개한다.
가수 겸 탤런트 야시키 다카진은 거칠 것 없는 말투로 사회문제에 독설을 날렸으나 살아생전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진 못했다.
현재는 재일한국인을 채용하는 일본기업이 늘고 있고,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도 당당히 ‘자이니치’임을 공개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 축구대표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이충성 선수를 비롯해 탤런트 소닌, 요리평론가 고 겐테쓰, 모델 안 미카 등이 대표적인 예다. NHK 아침드라마 <맛상>에 출연해 인기배우로 떠오른 다마야마 데쓰지 또한 일찌감치 “아버지의 조국이 한국”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러나 혐한단체 ‘재특회(재일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의 증오연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이니치에 대한 일본 사회의 시선은 아직까지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물론 과거와 비할 바는 아니다. 특히 1960~7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재일한국인이 일본 기업에 취업하기란 굉장히 어려웠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도 차별 때문에 취업을 포기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와중에 외모가 출중하거나 실력만 갖추면 누구나 뻗어 나갈 수 있는 연예계와 스포츠계는 재일한국인들에게 있어 좋은 취직자리였다. 하지만 “인기에 영향을 미친다”라는 이유로 소속사에서는 출신을 밝히는 걸 금기시했고, 한참이 지난 후 “일본을 뒤흔든 톱스타 아무개가 알고 보니 재일한국인이었다”는 특종기사가 주간지에 실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1970년대 수많은 일본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미녀스타, 마쓰자카 게이코. 그녀는 부친의 책을 통해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포츠계로 눈을 돌리면 그 유명한 역도산(1924∼1963)이 있다. 본명은 김신락.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그는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를 시작했다. 타고난 실력에 지독한 연습벌레였기 때문에 “요코즈나(스모 최고 지위)도 문제없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1950년 돌연 은퇴했다. 1951년부터는 레슬링으로 전향, 강인한 체력과 ‘가라데 촙(당수)’ 기술로 강적들을 제압하며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했다. 이때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역도산은 그야말로 국민적 영웅이 된다. 전후 피해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의 경기가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도산은 철저하게 ‘자신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무엇보다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이 두려웠을 터.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식민지 시대에도, 전후 해방이 되어서도, 설령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역도산은 1951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같은 재일동포이자 야구선수였던 장훈이 한참이나 선배인 역도산에게 “한국인인데 왜 한국인이라고 밝히지 않느냐”고 말했다가 역도산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당시 역도산은 “너는 식민지 시대의 어려움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건방지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노여워했다. 그런 역도산이었지만,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위해 1963년 분단된 조국을 처음 방문하게 된다. 판문점에 도착한 그는 웃옷을 모두 벗은 후 “어머니” “형님”을 애절하게 외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NHK 아침드라마 <맛상>에 출연해 인기배우로 떠오른 다마야마 데쓰지는 일찌감치 “아버지의 조국이 한국”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 재일교포 3세이자 ‘대타의 신’으로 불렸던 히야마 신지로 선수는 “일본 프로야구계에는 귀화한 선수를 포함해 한국인이 참으로 많다. 일선에서 뛰고 있는 선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며 2004년 <통일일보>에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식생활 차이로 인해 한국인이 체격이 좋은 데다, 지기 싫어하는 근성도 있기 때문인 듯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운동선수의 경우,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서 일본대표팀에 선발되면 남모를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개최됐을 때 일본대표팀에는 3명의 재일한국인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긴조 다쓰히코 선수였는데, 그는 한국에 와서 ‘반 쪽발이’라는 비난과 수모를 당하고 2000년 일본으로 돌아가 곧장 귀화했다.
그리고 2006년 WBC 1라운드와 8강, 4강까지 한국팀과 세 차례 맞붙게 되는데, 경기 결과는 일본의 2연패. 급기야 4강전을 앞두고 긴조 선수는 “한국의 스파이다” “일부러 치지 않았다”와 같은 흑색선전 및 비방에 시달려야만 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계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재일한국인 가운데 맨 먼저 ‘커밍아웃’을 한 스타는 엔카 가수 미야코 하루미다. 인기 절정이었던 1969년 그녀의 아버지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주간지를 통해 알려진 것. 그로부터 7년 후 일본레코드 대상 후보에 미야코가 오르자 “일본인도 아닌데, 왜 후보에 올려야 하냐”며 악의적인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세월은 흘러 지금의 젊은 자이니치들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본명이나 출신을 당당히 밝히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에 박일 교수는 “일본 사회가 편견 없는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봐주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