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이던 문재인 전 대표도 기지개를 켰다. 5월 9일 4·13 총선 직후 두 번째로 호남을 전격 방문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7주기 추모식 참여도 적극적이다. 또한 보수진영 인사 영입에도 뛰어들었다. 8월 말∼9월 초 예정된 차기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1당의 두 거장이 맞붙은 셈이다.
김종인 대표와 문재인 전 대표.
속살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역설한 ‘힘의 정치’다. 이들은 차기 전대 과정에서 자신을 뒷받침해줄 ‘강력한 이너서클’을 만들 수밖에 없다. 킹과 킹메이커 사이에 놓인 이들의 운명이다. 다만 팽창 일변도의 힘의 정치는 아니다. 세력의 최대화가 아닌 절제를 통한 ‘최적화 요소’를 찾는 쪽이 이긴다. 뚜렷한 자기 색깔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수세 국면에 빠지면 죽는다. 그 게임의 신호탄은 이미 쏘아 올려졌다.
4·13 총선에서 제1당으로 우뚝 선 더민주 내부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총선 전후로 급락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지율은 회복 국면에 들어갔다. 국민의당 호남 파급력은 건재하다. 반면 더민주 지지율은 조정에 들어가면서 횡보국면에 빠졌다. 5월 한 달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과 노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등 범야권 지지층 결집 요소들이 즐비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총선에서 더민주에 표를 찍어준 중도 무당파 지지는 빠지고 호남 영향력을 회복할 주자는 보이지 않는다. 더민주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된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의 핵심인 우상호 의원도, 정책위의장에 선임된 변재일 의원도 마찬가지다. 호남의 ‘문재인 비토론’은 상수가 된 지 오래다. 김 대표의 호남 파급력도 물음표다. ‘더민주냐, 국민의당이냐’를 놓고 숨죽인 호남 민심을 끌어안을 만한 인사가 전무한 셈이다. 사실상 전략적 제휴를 맺은 친문(친문재인)계와 친김(친김종인)계가 20대 국회 개원(5월 30일) 이후 정치적 변곡점마다 ‘호남 패배 책임론’을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다.
승부처는 역시 차기 전대다. 현재 차기 당권 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는 김진표(4선·경기 수원무) 송영길(4선·인천 계양을) 당선자를 비롯해 박영선(4선·서울 구로을) 이인영(3선·서울 구로갑) 이종걸(5선·경기 안양만안) 정청래(재선·서울 마포을) 추미애(5선·서울 광진갑, 이상 가나다순) 의원 등이 있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김부겸(4선·대구 수성갑) 당선자도 꾸준히 하마평에 오른다.
지역별로는 김부겸 당선자를 제외하고 모두 수도권 인사다. 계파별로는 김진표 당선자는 정세균계이자 범친노계, 송 당선자는 86그룹과 통합행동, 박영선 의원은 통합행동, 이인영 의원은 86그룹이면서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정파그룹인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에 발을 걸치고 있다. 정청래 의원은 범친노계, 이종걸 의원은 비노(비노무현)계, 추미애 의원은 중립성향, 김부겸 당선자는 통합행동이다. 친문 직계는 없지만 주류와 공동 전선을 펼 범주류 인사들은 넘쳐난다.
양 진영의 물밑싸움은 이미 시작됐다. 원내대표 경선에선 친문계 등 범주류의 지원을 받은 우상호 의원이 당선됐다. 우 의원은 5월 8일 원내부대표단 인선에서 친문계를 비롯해 손학규계·안희정계·박원순계 등 잠재적 대권주자 세력을 안배했다. 하지만 김 대표와의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야권의 정통한 관계자는 “모 아니면 도”라고 잘라 말했다. 양측이 김 대표가 정책위의장을 선임할 수 있도록 사전 협의를 했거나, 범주류 지원을 받은 우 원내대표 측이 원내대표단 인선 과정에서 ‘김종인 역할론’의 한계를 그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시한부 비대위 체제를 시사한 뒤 휴가를 떠난 김 대표는 5월 11일 당무에 복귀했다. 첫 작품은 ‘변재일 카드’다. 박광온 수석대변인은 “김 대표가 경제정당에 시동을 건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시한부 체제를 마친 김 대표가 경제비상대책기구 수장을 맡으면서 ‘김종인·변재일’ 연결고리를 통해 지도부 상층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종인 호’는 같은 날 손학규계인 정장선 총무본부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를 구성했다. 이 기구는 전대 룰 등을 준비하는 핵심 기구다. 간사는 이언주 의원이 선임됐다. 위원에는 민경한 윤리심판원 부원장을 비롯해 김윤덕 김영록 의원, 전재수 김종인 전현희 당선자 등을 임명했다. 비교적 김 대표와 가까운 인사를 조강특위에 전진 배치한 것이다. 이로써 양 진영은 전대를 향한 공격적인 진용을 구축하게 됐다.
눈여겨볼 대목은 차기 전대가 야권 세력구도에서 가진 정치적 의미다. 더민주 차기 전대의 가장 큰 특징은 차기 대권 관리다. 이른바 ‘관리형 대표’를 선출하는 자리다. 친문 직계나 친김계가 사생결단의 각오로 자파 후보를 내밀지 않아도 된다. 차기 당권 경쟁 과정에서 자기 진영에 유리한 ‘보증수표’만 약속할 수 있는 후보면 금상첨화다. 문 전 대표와 김 전 대표가 자파 의원들에게 공개적인 ‘오더’를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친문계와 친김계는 ‘힘의 극대화’가 아닌 ‘힘의 최적화’ 전략을 통해 진용 구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자기 색깔이 분명한 송영길 당선자와 이인영 정청래 의원 등보다는 김진표 김부겸 당선자 등의 주가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애초 정치권 안팎에선 친문계와 친김계의 합종연횡 대상으로 ‘추미애 박영선’ 의원이 거론됐다. ‘문재인-추미애’ 조합은 지역(영호남), 계파(친노와 비노), 세대(2040과 5060), 성(남녀) 구도상 최고의 시너지효과를 볼 수 있는 구도다. 하지만 추 의원은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민주당에서 노무현 탄핵을 가결한 ‘원죄’가 있다.
친문 직계 등 범친노 일부는 ‘당대포’ 정청래 의원을 지원할 것으로 보이지만, ‘친노 강경파’ 프레임에 대한 부담은 딜레마다. 정 의원은 김 대표를 향해 “새판 짜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전대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차기 전대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범주류 관계자는 “문 전 대표가 전대 과정에서 나서겠느냐”며 “당분간 조용한 행보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최근 전북을 방문한 문 전 대표는 당 대표 시절 과거 이회창계였던 보수진영 인사 영입전에 뛰어든 것으로 확인돼 물밑에서 외연 확장을 위한 광폭 행보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박영선’ 조합의 최소 공약수는 비노계다. 하지만 ‘셀프 공천’ 파동에서 양측 사이에 앙금이 생겼다는 얘기가 흘러나와 전면적인 제휴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 대표 측이 대표와 원내대표로 호흡을 맞춘 이종걸 의원 쪽으로 턴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이런 까닭에서 나온다. 김 대표가 ‘이종걸 대표론’을 고리로 비주류의 맹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의원의 낮은 득표력은 양측의 제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경제통이란 공통분모를 지닌 김진표 당선자도 합종연횡 대상이다. ‘김종인-김진표’ 조합은 비노계와 범친노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양측이 전격 손을 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대표 측 내부에선 차기 전대가 9월 정기국회 직전에 열리는 만큼, 2016년도 국정감사와 예산국회를 앞두고 ‘김종인 영향력’이 극대화될 것이란 기대도 숨기지 않고 있다.
반면 당권 출마에 가장 적극적인 송영길 당선자를 비롯해 이인영 의원은 ‘우상호 변수’에 부딪혔다. 당 안팎에선 “86운동권 그룹이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독식하겠다는 것이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최대 다크호스인 김부겸 당선자는 전대 출마 여부도 확정 짓지 못한 상태다. 통합행동 소속인 송영길 당선인과 박영선 의원과의 교통정리도 불가피하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이와 관련해 “차기 전대 과정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친문계가 물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지만, 김 대표도 4개월 동안 ‘문재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구도’를 만들기 위한 확실한 포지셔닝을 할 것”이라면서 “다만 두 진영 모두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밀지는 못할 것이다. 문 전 대표가 나서면 부메랑을 맞을 수밖에 없고, 김 대표가 당권에 개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더민주 내부 갈등의 최대 고비는 차기 전대 룰 재정비다. 정변 수준으로 격상할 더민주 당권 경쟁의 시한폭탄 돌리기는 이미 여의도 주변을 둘러쌌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