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타투이스트 이랑
기억은 시간과 함께 흩어진다. 기억을 붙잡기 위해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기록을 남기지만 닳고 닳다 결국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몸에 새긴 기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에게 타투(문신)는 가장 강력한 기억의 매개체다.
물끄러미 손끝을 본다. 그러다 한 사진으로 눈을 옮긴다. 시선은 팔을 타고 목으로, 다시 등과 허리로 내려간다. 말은 없다. 조용히 한 곳, 한 곳을 응시하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이 반복될 뿐이다. 타투이스트 이랑 씨(41)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그를 함께 비춰보고 있었다.
문제가 된 사진은 지난 4월, 이랑 씨의 지인이 골프장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언제부터 사진이 게시돼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랑 씨는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타투이스트로 활동하며 살아온 10년의 삶이 허탈해졌다. ‘누군가의 눈에는, 또는 어떤 집단의 눈에는 그저 몹쓸 몸을 가진, 혐오스러운 신체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격한 감정보다 자괴감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랑 씨는 앞서의 사진 속 타투에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말했다. 스물세 살, 홀로 상경해 시작한 일이 5년 만에 무산됐다.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지난 2005년, 그의 오른쪽 팔에 처음 타투가 새겨졌다.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랑 씨는 타투이스트로 활동하며 국회 앞 퍼포먼스 등 타투 합법화 운동을 했고, 매년 일본을 찾아 위안부와 독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항의 집회를 열었다. 그 결과 국내 경찰서 임의동행 전력만 수차례에 일본 경시청에선 그를 주요 감시대상에 올렸다.
이랑 씨는 몸에는 앞서의 기억들이 모두 새겨져있다. 국내 타투이스트들의 염원을 담은 별, 위안부와 독도 도발에 항의하는 내용의 타투가 그것이다. 이랑 씨는 “지금 내 몸에 새겨진 타투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하나의 작품이면서도 지난 10년간 지켜온 신념과 정체성이다. 내 삶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이를 근거로 이랑 씨는 앞서의 사진을 게시한 골프장과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 모욕죄와 저작권법 위반을 주장하고 있다.
타투이스트 이랑 씨와 한 골프 클럽하우스에 게시된 금지 문구와 사진.
이랑 씨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스카이의 구관희 변호사는 “화가가 캔버스에 그린 작품처럼, 타투도 개인 창작물로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물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규정하고 있다. 어떤 도안을 몸의 어느 부분에 새기는지 결정하는 창작활동이 타투에도 포함 돼, 하나의 저작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국내선 타투가 의료행위로 분류돼 의사가 시술하지 않은 이랑 씨의 타투는 ‘불법’으로 취급되지만, 저작물 제작과정의 위법성은 저작물성을 가르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구 변호사는 “불법 성인비디오도 저작물로 인정받은 판례도 있다. 다른 법에 의해 타투가 불법이라고 해도 그 결과물인 그림의 저작물성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해외에선 타투가 새겨진 당사자뿐만 아니라 타투를 시술한 타투이스트에게도 동의를 구하고 사진 등을 쓴다”며 “국내에선 타투 저작권을 다투는 소송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이랑 씨는 “그동안 타투를 불편해 한다거나 시각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왔다. 사회적 편견과 오해도 받아들이고 늘 존중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무조건 타투를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라면서도 “한 문화에 대한 ‘비평’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원치 않게 누군가가 자의적으로 규정한 기준으로 타투가 혐오고, 그렇게 비춰져야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한 실무자의 실수일 수도 있다. 대기업의 횡포나 갑질로는 생각하진 않는다”면서 “스스로 지켜야할 인격이고 보호 받아야할 권리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해당 대기업 관계자는 “안내판을 제작한 직원의 실수였다”며 “분명한 잘못이라고 인정돼 문제의 경고문을 곧바로 철거했다. 고소와는 별개로 정중하게 사과부터 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