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협약을 먼저 신청한 곳은 현대상선이다. 현대상선은 지난 2013년부터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해 왔다. 그럼에도 결국 지난 2월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채권단이 제시한 조건은 용선료 인하와 사채권자 채무 재조정이다.
현대상선은 용선료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현대상선은 지난해 용선료만 1조 8793억 원을 지불했다. 매출 5조 7685억 원의 30%가 넘는다. 호황기에 맺은 높은 용선료가 장기 불황의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이제는 경영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호황기인 2009년 컨테이너당 유럽까지 운임이 2700달러 수준이었지만 올 초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며 “그나마 최근 조금 오른 게 500달러선”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상선은 그동안 해외 22곳 선주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용선료 협상을 해왔다. 그러나 영국계 선주사인 조디악 등 5곳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용선료 협상을 매듭짓기 위해 현대상선은 합의를 이루지 못한 5곳의 선주사를 국내로 초청하는 강수를 뒀다.
현대상선은 지난 5월 18일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나비오스(Navios), 다나오스(Danaos) 등 컨테이너 선주사 4곳과 용선료 인하 협상을 벌였다. 채권단을 대표해 정용석 산업은행 기업구조조정 부행장이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시종일관 고자세를 보여온 조디악은 초청에 응하지도 않았다.
현대상선 다른 관계자는 “이번 협상에서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각 선주사와 개별적인 협상은 계속하고 있으며 용선료 인하 합의를 도출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채권단도 현대상선을 크게 압박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채권단에서 현대상선에 제시한 기한은 있지만 융통성 있게 적용할 것”이라며 “용선료 협상이 잘 안 될 것이 분명하다면 법정관리로 가겠지만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보이는데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무조건 법정관리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자율협약을 신청한 한진해운도 현대상선과 비슷한 길을 가야 하는 처지다. 채권단에서 제시한 조건들도 현대상선과 비슷하다. 해운동맹 가입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붙었지만 최근 새롭게 개편된 디 얼라이언스에 포함되면서 이 문제는 해결했다.
한진해운은 현대상선과 비교되는 상황을 마뜩치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현대상선과 달리 이제야 자율협약을 위한 조건 이행을 시작했다는 이유에서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실적도 훨씬 나은데 현대상선과 똑같이 비교한다”며 “우리 상황이 더 좋다는 게 아니라 현대상선과 똑같다고 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해운은 지난 19일 첫 사채권자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그러나 한진해운은 첫 용선료 인하 협상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캐나다계 선주사인 시스팬이 용선료 인하를 거절했다고 알려졌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시스팬이 ‘용선료 인하는 없다’는 회사 기본 방침을 밝힌 것을 일부 언론이 외신을 잘못 인용 보도한 것”이라며 “한진해운은 아직 시스팬과 본격적인 협상에 나서지도 않은 상태”라고 해명했다.
한진해운은 사채권자 집회에서는 소득을 거뒀다.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에서 열린 첫 사채권자 집회에서 한진해운 측이 제시한 채무 재조정안이 통과됐다. 2013년 5월 발행한 제78회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조기상환일을 5월 23일에서 9월 23일로 4개월 늦추는 데 성공했다. 아직 사채권자 집회를 진행하지 않은 현대상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현대상선의 경우 5월 29일과 6월 1일 양일간 사채권자 집회가 예정돼 있다”며 “그전에 용선료 협상이 긍정적으로 마무리되면 사채권자 집회는 큰 무리 없이 지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부에서는 글로벌 해운동맹에서 제외된 현대상선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해운동맹에 소속되지 못하면 영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해운동맹이 재편되면서 한진해운은 잔류에 성공했지만 현대상선은 배제됐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디 얼라이언스에 한진해운이 포함된 것은 해외 선사들이 한진해운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정작 현대상선은 해운동맹 배제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올 초 해운동맹 개편이 논의되던 때에 현대상선은 이미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한 상태였지만 한진해운은 그렇지 않았다”며 “해운동맹은 철저하게 서로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에 현대상선의 경영 정상화가 계획대로 진행되면 동맹 재가입은 큰 문제없이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가 자금력에 대해서는 한진해운 쪽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업계는 한진해운이 그룹을 통해 모집할 수 있는 자금 여력을 4000억 원 내외로 보고 있다. 향후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대상선은 당장 5월 말부터 현대증권 등 그동안 정리한 자산의 매각 대금이 들어온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이달부터 들어올 자산 매각 대금이 1조 원이 넘는다”며 “향후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모든 조건을 충족해 자율협약에 들어가도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이 경영정상화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용선료 협상, 채무 재조정, 해운동맹 잔류는 마치 톱니바퀴처럼 서로 얽혀 돌아가는 것”이라며 “어느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가 멈출 수밖에 없고 반대로 어느 하나가 잘 풀리면 다른 것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게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 없애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며 “큰 흐름을 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훈 기자 julia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