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바라지 골목 ‘무악2구역’ 재건축 현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내가 누구예요. 서울시장인 것은 알죠?”
지난 5월 17일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 박 시장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단 한마디로 잠재웠다. 골목 주민들과 시민단체 회원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그가 “여기 책임자가 누군가. 어떤 근거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나. 명함 보여달라”고 다그치자 마스크를 낀 용역업체 직원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옥바라지 골목’에서 구본장여관 영업을 해온 이 아무개 씨와 또 다른 건물 소유자의 딸 최 아무개 씨는 박 시장을 향해 “도와달라”고 절규했다. 둘은 무악2구역 재개발지구 335세대 중 유일하게 현장을 지키고 있는 옥바라지 골목 주민이었다. 옥바라지 골목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독립운동가 등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졌다.
역사성 보존을 이유로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재개발조합은 그동안 충돌을 거듭해왔다. 지난 17일 새벽 6시경 서울중앙지법은 옥바라지 골목이 포함된 무악2구역 주민들을 상대로 강제집행에 나섰다. 이날 오후에 예정된 골목주민들과 시장의 면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레 소식을 접한 박 시장이 이곳을 찾았다.
당시 재개발조합, 용역업체 직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은 격렬한 몸싸움 중이었다. 오전 11시경 등장한 박 시장은 “여기 다 철수해. 철수하라니까”며 용업업체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10여 분간의 실랑이 끝에 주민들이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기에 남게 해달라”고 호소하자 박 시장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이 공사는 없다. 내가 손해배상 당해도 좋다”고 공언했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골목 주민들의 농성 천막.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지난 19일 <일요신문> 취재진은 무악제2구역을 찾았다. 재개발구역 옆 인도에 설치된 하늘색 천막 아래, 골목 주민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박 시장이 다녀간 뒤에도 길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2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이틀 밤을 지새웠다.
천막에서 만난 이 씨는 “지하실에 값진 물건을 두고 왔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서울시장이 왔다만 갔지 펜스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래도 시장의 말을 믿고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최 씨는 “박원순 시장이 왔다가서 우리가 기뻐할 줄 알았나. 그 이후 발표된 서울시 입장을 보고 너무 기가 막혔다. 박 시장이 영웅이 됐지만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그림자로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용역업체 직원들은 철거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가림막 사이로 용역업체 직원들이 탑승하고 있는 승합차 한 대가 보였지만 골목 주민들의 진입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아무개 씨 남편은 “강제철거가 시작되자 몸싸움이 심하게 벌어졌다. 크레인 두 대가 갑자기 들어왔고 짐 싣는 탑차 3대와 용역들이 100명 가까이 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가림막에 쓰인 글을 보고 있는 시민.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당시 ‘박 시장의 행보가 적절했냐’를 두고 갑론을박은 여전하다. 지난 18일 서울시의 입장 발표가 논란의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서울시 대변인은 “박 시장의 발언은 사업 자체를 중단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장 철거를 중단하고 합의 없이는 더 이상 절차가 진행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전했다. 지난 19일 기자와 만난 서울시 관계자의 토로다.
“재개발 정비구역 지정은 시청이 한다. 그 이외의 조합설립 인가부터 착공까지는 전부가 종로구청 권한이다. 시나 구에서 법원의 명도집행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 이주민들에게도 법원 소송이 우선이다. 무악2구역은 이미 관리처분이 난 지역이다. 강제집행을 최대한 피하려고 골목 주민들과 사전협의체를 구성해 5번 개최했고 조합과 구청은 사전협의를 수십 번 했다.”
박 시장은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10년 설립된 무악2구역의 재개발조합은 지난해 7월 종로구청으로부터 관리처분 인가를 받았다. 최근 재개발조합은 이 씨를 상대로 제기한 명도소송에서 승소했다. 지난 19일 만난 재개발조합장은 “우리도 강제집행 전날에 통보를 받았다. 강제집행은 법원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졌다.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용역도 우리가 동원한 것이 아니다. 박 시장의 발언은 초법적이고 월권적인 행위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엔 또 다른 진실이 있다. <일요신문> 취재결과 335세대 중 이주를 반대하고 있는 이 씨와 최 씨 측은 이미 보상금을 수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씨는 건물과 토지 보상 명목으로 지난 1월 18일 약 5억 7900만 원을 수령했다. 최 씨의 모친 홍 아무개 씨(건물 소유주) 역시 지난 2월 23일 약 2억 2800만 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부동산 등기부에 따르면 이 씨와 홍 씨의 건물과 토지 소유자는 ‘무악제2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이다. 이에 대해 이 씨는 “차압이 들어올지 몰라서 변호사를 통해 공탁금을 찾았다”고 해명했다. 최 씨는 “우리 선임변호사가 이런 분쟁 중에 압류를 당할 수 있으니 금액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의유보를 하고 찾아놓으라고 말을 해서 찾았다 우리도 공탁금을 안 찾으려고 했다. 우리가 법을 어떻게 알겠나. 변호사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다. 보상금에 대한 증액소송도 따로 진행 중이다”라고 전했다.
박 시장이 당시 현장 방문을 했을 당시 이 같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을까. 서울시 관계자는 “박 시장이 그 발언을 했을 당시 두 사람이 보상금을 수령해 간 사실을 알았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 다만 소유권이 이미 다 조합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고 말했다. 종로구청 관계자 역시 “시장님이 명령했으니까 지금 상주하는 용역들 보고 ‘니네 나가라’ 그렇게 할 수 있나. 용기 있는 사람도 없고 권한도 없다. 이미 다 진행된 마당에 ‘재개발 안해 끝났어’ 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또 하나의 쟁점은 ‘알박기 논란’이다. 이 씨는 구본장여관의 건물과 토지를 2014년 6월 5일에 구입했다. 무악2지구에 대한 종로구청의 재개발사업 시행인가는 2013년 11월 22일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조합 측은 “이 씨는 사업 시행인가 이후에 들어왔기 때문에 신종 알박기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씨는 20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알박기는 전혀 아니다. 억울하다. 2011년도에 이미 세입자로 왔고, 당시 재개발 여부는 알지 못했다. 매매 때에도 몰랐다. 단지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성 때문에 여관을 보존하고 싶을 뿐이다. 말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