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원(정): 감독 사퇴 후 두 달만인데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궁금해 하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유도훈(유): 그동안 가장 노릇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가족들을 챙겨야 했어요. 가족들과 함께 미국 서부 지역을 돌았고요. 귀국해서는 가까운 지인들을 몇 분 만났고 최근엔 체력 관리와 ‘심리학’ 관련 독서에 빠져있습니다.
정: 농구계에선 유 감독이 산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유: (웃음) 아! 그건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 지인들을 만나러 다니니까 제 관리가 너무 안 되는 것 같아서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아는 분이 강원도 오대산의 성원사를 소개해주길래 한 일주일 지내다 왔습니다. 새벽 3시에 열리는 불공만 참가하면 합숙이 가능했거든요. 스님들의 목탁 알람을 들으며 혼자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졌어요. 큰 스님의 좋은 말씀도 들었고요. 내 입장과 남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고사 성어 ‘역지사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조언이었습니다.
정: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했기에 절까지 들어가서 반성을 해야 했나요?
유: 올해로 제가 팀을 맡은 지 3년째 되는 해인데, 사실 팀 조직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시점이거든요. 하필 이런 중요한 상황에 제가 개인적인 일로 그만두게 돼서 선수들에게 정말 미안할 따름입니다. 저는 코치들이나 선수들을 ‘가족’이라고 여겼고 그들에게 ‘가족적인 팀 분위기’를 제일 강조했는데 ‘나 또한 정말 제대로 했던가?’ 하는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정: 갑자기 팀을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어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요?
유: 다 제 탓입니다. 시시콜콜하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 할 말이 없습니다.
정: KT&G에서 2년 동안의 감독 생활은 어떠했나요?
유: 그 전에는 제가 코치였잖아요? 감독을 보좌하고 선수들을 관리하는 중간 역할에 익숙했었죠. 감독이 돼서는 저도 코치들에게 선수관리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못하면 더 심하게 야단을 쳤고 잘하면 더 크게 칭찬했어요. 감독이 모든 걸 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정상을 향한 길을 바르게 안내만 하는 역할이라고 봐요. 저도 선수시절이나 코치 시절 여러 번 우승을 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봤죠. 그 경험이 제게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죠. 결국 직접 정상에 올라야 하는 사람들은 선수들 아니겠습니까?
▲ 유도훈 감독은 감독 사퇴 후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한결 여유있는 모습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급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제가 현역시절 동료나 후배들을 잘 만나서 우승을 참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고3 때 전관왕, 대학 4학년 때 전관왕(오성식, 이상범, 정재근, 강양택과 함께) 프로에 와서도 이상민, 김지홍 등 후배들을 데리고 3연패를 하면서 은퇴했거든요. 그러다보니 감독이 돼서도 당연히 우승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고 결국 여유 없이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아요.
정: 신선우 감독과는 지난 95년 감독과 선수로 만나 06-07시즌 KT&G 감독 취임 전까지 13년 동안 실과 바늘의 관계였어요.
유: 사실 신 감독님과는 감독과 코치의 관계보다는 스승과 제자라는 느낌이 더 강해요. 아마 시절엔 예선 탈락도 같이 해봤고 프로에서는 함께 우승도 해봤습니다. 늘 한마음으로 같이 갔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요. 선수운영이나 관리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감독이 된 후 신 감독님 스타일을 많이 따라해 보기도 했어요. 가령 감독님께서 좋은 책을 읽게 되면 선수들에게 책을 사서 나눠주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지난 2년간 저도 똑같이 우리 선수들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정: 신선우 감독이 이끄는 LG를 경기에서 만났을 때는 어땠나요?
유: 부부나 마찬가지인 관계였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죠.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서는 개의치 않고 서로 이기기 위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지난해 상대전적이 3승 3패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정: 다시 한 번 감독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꼭 해보고 싶습니까?
유: 예전에는 열심히 하면 성적이 나고 성적이 나면 팬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수들은 코트 위에서 플레이로 보여주고 감독은 성적으로 입증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사실 그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좋은 성적은 기본이고 우선 팬들을 위한 서비스를 더욱 고민해야 하고 좀 더 크고 넓은 시야를 확보해서 선수들에게 교육을 많이 시켜주고 싶습니다. 팬들 없는 프로농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선수 개개인이 팬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코트 위에서뿐만 아니라 코트 밖에서도 늘 팬들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 감독직을 떠난 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코트가 그립진 않나요?
유: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감독을 그만둔 그 다음 날부터 코트가 그리울 겁니다. 하지만 마냥 그리워하기보단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을 토대로 부족한 부분을 더욱 채우려고 합니다. 철저한 준비로 다시 한 번 기회가 왔을 때 지금보다 더 좋은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 왼쪽부터 <일요신문> 이영미 기자, 유도훈 감독, 정지원 아나운서. | ||
유: 사실 저도 조심스러운데요. 아이들에게는 친구들이 “네 아빠 감독 그만뒀다며?”라고 묻는 게 상처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고 집안에서는 오랜 시간 함께 있다 보니 저도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최근엔 자제하고 있습니다. 결혼 12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인데 가족사랑에 대해 많은 걸 느끼고 있는 중이에요.
정: TV 농구중계는 보나요?
유: 네. 사실 동부와 KT&G의 개막전도 봤습니다. 아직도 KT&G는 내 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 주희정 선수와 정지원 아나운서의 인터뷰도 봤습니다. 그 때 희정이가 “유 감독님이 없으니 내가 구심점 노릇을 더 잘하겠다”는 말을 듣고 선수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더라고요. KT&G 감독으로 있을 때 전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팀 구성원들이 제 방향에 잘 따라주었어요.
정: 마지막으로 그동안 유 감독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팬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유: 저는 농구에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이제 저도 가르치는 입장이 됐기 때문에 농구를 가르치면서 인생을 가르치는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농구를 통해 얻었던 많은 것들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농구인이 되겠습니다.
둘째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며 부녀지간의 정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유도훈 감독. 여느 아빠와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이다. 불현듯 2년 전 KT&G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가 떠오른다. 넘치는 의욕과 승부에 대한 강한 근성으로 중무장되어 있던 그의 모습이. 이제 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 감독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유가 생기고 한결 성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 내내 감독 사퇴 이유에 대해 ‘줄기차게’ 물었지만 그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시간이 좀더 지나 그가 여유있는 상황이 됐을 때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KT&G에 사랑하는 ‘가족’, 선수들이 있는 한 그는 영영 입을 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지원 CJ미디어 아나운서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