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증권시장 상장폐지에 관한 내용은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 제48조에 열거돼 있다. 상장폐지가 될 수 있는 사유는 정기보고서 미제출, 감사인 의견 미달, 자본잠식 등 다양하다. 이처럼 엄격하게 관리‧감독하는 것은 무엇보다 일반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동규정 제7조에는 신청에 따른 상장폐지 즉 자발적 상장폐지도 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거래소에 상장폐지 신청서와 첨부자료를 송부하고 요건을 충족하면 상장폐지가 가능하다.
이 가운데 전체 발행 주식의 95% 이상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충족하기 어려운 요건이다. 이미 상장돼 있는 주식을 장내매수를 통해 95% 이상 확보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특히 지분구조상 개인투자자 비율이 많을 경우 이 주식을 전부 매수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거래소 시황판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그럼에도 일부 기업이 자진해서 상장폐지를 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은 “상장 유지의 실익이 없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경영 판단이 가능하다”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 상장폐지를 추진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코스닥시장에 상장돼 있는 아트라스BX다. 이 회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알려진 한국타이어그룹의 계열사로 자동차용 배터리 등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 3년간 매년 500억 원 이상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할 정도로 우량기업으로 분류된다.
아트라스BX는 올 3월 상장폐지를 위한 주식 공개매수 사실을 공시하며 “비상장 상태에서 외부환경 변화에 기동성 있는 경영체제를 갖추고, 빠르고 유연한 경영 판단을 통해 기업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함”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그동안 상장 상태에서도 꾸준히 흑자를 기록해온 점에 비춰볼 때 ‘경영 효율성 제고’라는 이유는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재계 일각에서는 상장폐지 속셈이 오너 일가의 그룹 승계 자금을 마련하려는 데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얘기의 근거는 무려 4700%를 상회하는 아트라스BX의 유보율이다.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을 신규 투자 등의 형식으로 외부에 유출시키지 않고 내부에 쌓아둔 것을 유보금이라 하는데, 이를 자본금과 나눈 비율을 유보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유보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해당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풍부하다는 증거다.
만일 한국타이어그룹이 유보율 4700%가 넘는 아트라스BX를 상장폐지시키고, 그룹의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 합병한 후 높은 배당을 할 경우 오너 일가가 가져갈 수 있는 현금은 어마어마할 것으로 분석된다. 후계 승계를 위한 자금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조양래 한국타이어그룹 회장과 두 아들인 조현식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대표이사, 조현범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사장이 각각 23.59%, 19.32%, 19.3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결국 아트라스BX는 지난 5월 23일 2차 공개매수가 끝난 현재 89.6%의 지분 확보에 그쳐 자진 상장폐지에 실패했다. 아트라스BX 관계자는 “상장폐지는 저평가된 주가가치를 재평가하고 상장 유지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이라며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 합병은 논의조차 된 적이 없다”며 합병설을 일축했다.
자진 상장폐지를 시도하고 있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도레이케미칼은 ‘먹튀’ 논란에 휘말렸다. 도레이케미칼은 2014년 일본 화학회사 도레이의 한국법인 도레이첨단소재가 웅진케미칼을 인수해 탄생한 회사다.
지난해 5월과 7월 두 번에 걸쳐 자진 상장폐지를 위한 공개매수를 실시했으나 일반주주들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레이케미칼 측은 지난 2월 “상장폐지 계획을 백지화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상장폐지 의지를 재차 드러냈다. 도레이케미칼은 “비상장회사가 되면 적극적인 기술 이전과 외부환경 변화에 유연한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장폐지 이유를 밝히고 있다. 반면 일반주주들은 상장폐지 후 기술 이전을 빌미로 알짜 기술과 자산을 해외로 유출해 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호텔롯데는 주식시장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반대로 비상장사인 핵심 계열사의 상장을 통해 자금조달 이외에 부수적인 효과를 노리는 기업도 있다. 6월 21~22일 일반 공모 청약을 앞두고 있는 호텔롯데가 대표적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호텔롯데 상장으로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할 발판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호텔롯데는 상장으로 확보한 자금을 면세점 확장 등 사업 확장에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호텔롯데가 그룹 내 주요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동빈 회장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이라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또 이번 상장으로 복잡하게 얽힌 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와 롯데그룹의 국적 논란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일부에서는 경영권 분쟁이 없었어도 롯데그룹이 호텔롯데 상장을 추진했겠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기업 또는 오너의 필요에 따라 주식시장을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일반주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까닭이다.
정재훈 기자 julia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