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휴대폰 번호를 바꾼 사연
허정무 감독은 얼마 전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이전에는 기자들 전화도 받고 질문에 대답도 해줬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부분을 홍보국에 일임했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언론을 상대하는 게 제일 어렵고 힘들다”라고 대답했다.
“2000년 때도 겪은 일들이지만 역시 기자들과의 관계가 항상 숙제였다. 감독이 어떤 기자랑 친하다든가, 어떤 매체한테만 말을 해준다는 등 매번 이상한 말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아예 전화를 안 받기로 했다. 그런 게 서로 편할 것 같았고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대응을 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허 감독은 이전 <일요신문>에 나온 기사(842호 ‘선수들이 작심하고 쏟아낸 위기의 허정무호’)에 대해서 언급했다. 2010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인 요르단과의 원정 경기를 끝낸 대표팀이 투르크메니스탄전을 대비해 곧장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하자마자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던 게 선수들의 불만을 샀다는 내용이었다.
“요르단에서 터키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 이동한 날에 훈련을 했던 건 경기 안 한 선수들과 경기를 뛴 선수들의 체력 상태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출전 선수들한테는 가벼운 스트레칭과 회복 훈련을, 경기에 뛰지 않은 선수들은 조금 강도 높은 훈련을 하면서 선수들의 체력 상태를 엇비슷하게 만들어 놓으려 했다. 그런데 그 훈련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는 게 납득이 안 된다. 더욱이 선수들 입에서 들은 얘기를 확인도 안 하고 기사화한 부분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허 감독은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무조건 기사화하는 건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언론에 등을 돌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정한 게 ‘공식 채널’을 통한 접근이었다.
허정무호 출범 후 치른 16경기 동안 모두 51명의 선수들이 거쳐 갔고 이중 21명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기성용, 이청용, 이근호, 정성훈 등은 모두 허 감독이 발탁한 재목들이다. 이에 대해 몇몇 축구전문가들은 대표팀 선수들이 너무 자주 바뀌어 조직력이 극대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허 감독은 세대교체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전 올림픽대표팀을 맡고 있을 때도 박지성 이영표 등을 기용한 데 대해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내가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의식적으로 영표나 지성이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했던 부분은 싹 무시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기성용이나 이청용이 A매치 데뷔 후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면 또 다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다행히 성용이나 청용이는 그 당시 선수들보다 훨씬 더 잘해줬다.”
허 감독은 51명의 선수들이 대표팀을 오갔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다시 대표팀에 들어올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없이 뽑은 선수들이 아니라는 것.
“언제까지 월드컵을 경험했던 선수들만 기용하겠나.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을 끊임없이 발굴해서 기존의 선수들에게 자극도 주고 새로운 얼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내가 결산기자회견에서 ‘히딩크 감독의 여운을 걷어내야 한다’고 한 말 기억하나? 그 말 속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중 한 가지가 히딩크 감독 밑에서 뛴 선수들과 내가 뽑은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돼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운재 사면론에 대해
허정무 감독은 한때 축구계를 들끓게 했던 ‘이운재 사면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요르단과의 2010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한 뒤 가진 공식기자회견에서 허 감독은 “어느 시점이 되면 협회에 이운재 선수의 사면을 건의할 생각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론은 맹렬히 허 감독을 비난하며 허 감독의 도덕성까지 논란의 대상이 됐다.
“감독 입장에서 이운재는 필요한 선수였다. 그 필요성을 당시 기술위원장이었던 이영무 위원장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솔직히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 이 위원장은 대표팀이 잘 되는 방향으로 그 문제를 풀어 나가려 했지만 부정적인 여론에 부딪히면서 곤란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내가 나서서 그 얘기는 없던 걸로 마무리했지만 그 일 이후로 나와 이영무 위원장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위원장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9월 10일 북한과 비긴 후
지난 2월 20일 동아시아연맹선수권대회 북한전에서 1-1로 비긴 것을 시작으로 5월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요르단과의 남아공월드컵 3차예선에서 2-2로 비기기까지 허정무호는 4경기 연속 무승부를 기록하며 ‘허무축구’라는 비난을 받았다. 9월 10일 상하이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북한전이 1-1 무승부로 끝나자 허 감독에 대한 비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때 허 감독은 ‘잠깐’이었지만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날 결심을 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2000년 때도 가슴 아픈 경험을 한 바 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좋은 성적을 통해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비난이 홍수를 이뤘다. 아예 인터넷을 보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너무 힘든 나머지 평소 존경하는 축구 원로를 찾아가 대표팀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다는 얘길 꺼냈다가 혼쭐이 났다. 그 따위 정신 자세로 어떻게 대표팀을 이끌어 가느냐며 화를 내셨다. 언론의 비난은 어떤 지도자라도 안고 가야하는 부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그 분이 <리더와 보스>란 책을 주시더라.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돌아봤다. 내가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모양이다.”
#안정환 이동국 이천수에 대해
허정무 감독은 소위 스타플레이어로 꼽히는 안정환 이동국 이천수 등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속팀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한 부분들이 아쉽다는 얘기다.
“선수들이 너무 쉽게 안주하는 것 같다. 새로운 무대나 리그에 도전했다면 진정으로 그 팀에 적응하고 융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어느 부분에선 그런 노력들을 소홀히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터 J리그가 마지막 도전 무대가 됐나. 단계를 밟든, 건너뛰든 간에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데도 몇몇 선수들은 그런 의지조차 보이질 못했다. 영원한 스타플레이어는 없다. 그런 점에서 난 박지성이나 이영표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교통 체증 덕분에 허정무 감독과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허 감독이 ‘허무축구’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때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었다는 부분에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허 감독한테 2008년은 ‘파란만장’이란 단어 하나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으로 장식한 허 감독에게 새해 소망을 물었더니 “대표팀이 좋은 성적 내고 월드컵 본선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라면서 활짝 웃는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