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젤코. 임영무 기자namoo@ilyo.co.kr | ||
다른 용병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강철 체력과 엄청난 승부욕을 바탕으로 삼성화재의 막강 화력을 이끄는 안젤코와 지난 1월 2일 새해 첫 인터뷰를 가졌다. 안젤코와의 인터뷰에는 크로아티아어를 전공한 통역 유선우 씨와 삼성화재에서 영어 통역을 담당하는 손정식 씨가 도움을 줬다.
새해 첫날 치른 대한항공과의 경기에서 3-1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둔 탓인지 안젤코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환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치용 감독이 인터뷰를 위해 오전 훈련에서 제외시켜준 부분이 그를 ‘무지하게’ 행복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안젤코는 코트에선 펄펄 뛰어 다니는 야생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직접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보면 진지하면서도 재치있고, 순박하면서도 예리한 면모가 눈에 띈다. 먼저 개막 초반 부진한 성적을 거듭하다 최근 7연승을 올리는 등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해봤기 때문에 이번 시즌은 조금 쉬울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든 부분도 있었다. 선수들 사이에도 약간 소통의 문제가 있었는데 오래가진 않았다.”
‘소통의 문제가 있었다’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안젤코는 ‘내 문제였지 다른 선수들의 문제는 아니었다’라고만 덧붙인다. 모범 답안만 내놓는 ‘안젤코식’ 대답이다.
삼성화재는 올 시즌을 앞두고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대캐피탈과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정작 신치용 감독은 노장들이 많은 상태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란 어렵다고 봤다. 그러나 안젤코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나타냈다.
“선수들이 1년 사이에 갑자기 노화 현상이 일어나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유럽에선 서른여덟살의 나이에도 젊은 선수들 못지않게 좋은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 운동을 해보니까 유럽과는 그 리듬이 많이 다르다. 여긴 체력 운동이 심하고 훈련량이 많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계속 누적될 경우 조금씩 힘들어질 수 있다. 감독님이 말씀하신 부분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한국 생활 2년째를 맞는 안젤코는 지난 시즌과 비교했을 때 어떤 부분에서 차이를 느끼고 있을까.
“작년보단 모든 면에서 쉽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새로워서 어렵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편해졌다. 단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크리스마스나 1월 1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다.”
안젤코는 지난 시즌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 때 정규리그 경기가 펼쳐진 데 대해 자신보다 크로아티아에 있는 친구들이 더 놀라워한다며 성탄절 경기 체험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올 시즌도 어김없이 삼성화재는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과 1월 1일 경기를 치렀다.
지난 시즌, 용병들 중 최저 연봉을 받고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안젤코는 올 시즌 연봉이 두 배 이상 껑충 뛰었다(약 22만 달러). 삼성과 재계약하기 전 다른 리그의 ‘러브콜’이나 약간의 망설임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다른 리그에서 ‘러브콜’이 많았다. 그러나 삼성을 통해 내 존재감이 생겨났기 때문에 삼성과의 재계약을 망설이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팀에 가서 새롭게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내 진로를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고민해 보려고 한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었지만 안젤코는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초반 안젤코는 삼성화재의 강도 높은 훈련에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그중에서도 ‘러닝’은 그한테 ‘쥐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몸이 팀 훈련에 적응이 됐다며 무척 신기(?)해 한다.
“훈련이 빡센 건 사실이다(웃음).
▲ 2일 삼성블루팡스 배구단 숙소에서 안젤코가 취재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안젤코가 가장 어려워했던 수비와 디그도 올 시즌에는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다.
“솔직히 수비는 작년보다 이번 시즌이 더 쉽다. 훈련도 많이 했고 그만큼 단련됐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선 공격수는 공격만 했다. 수비와 디그는 할 줄도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걸 하지 않고선 살아 남을 수가 없더라. 집중력 있게 트레이닝을 받았고 그 덕분에 지금은 블로킹이나 수비하는데 있어 부담이 없다.”
얼핏 보면 키만 크고 살짝 마른 체형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근육질이다. 인터넷에는 안젤코의 어깨 근육과 등근육만 클로즈업한 사진이 돌아 다닐 정도로 멋진 몸매를 자랑한다. 기자의 칭찬이 이어지자 얼굴이 빨개진 안젤코가 “난 여름이 좋다. 내 멋진 근육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라고 한술 더 뜬다. 옆에 있던 통역 손정식 씨는 “안젤코에게 근육 운운했다간 다른 인터뷰 못 한다”며 빨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고 부추긴다. 안젤코와 손정식 씨의 농담성 말싸움에 한바탕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 한 가지. 과연 안젤코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에 대해 안젤코는 체력보다 정신력이 더 강하다고 대답한다.
“잘 알려진 대로 보스니아에서 전쟁을 경험하며 갖은 고생을 했고 이 과정에서 굉장히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됐다. 난 경기할 때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도 패배를 떠올린 적이 없다. 공격할 때도 최선을 다하고 실수를 줄이려고 또한 최선을 다한다. 이렇듯 남다른 승부욕이 체력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삼성화재가 연승 행진을 거듭하자, 항간에선 ‘삼성화재의 안젤코에 대한 공격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지적이 나왔다. 안젤코도 이미 이런 얘기를 많이 들은 모양이다. 질문하자마자 대답이 튀어나왔다.
“난 공격수이고 점수를 많이 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을 받는다면 마음을 넓게 가지고 당당히 받아들이려 한다. 삼성 선수들이 나이도 있고 좋은 공격수가 많지 않아 내 역할이 커진 건 사실이지만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공격을 안 하는 바보 같은 선수도 있을까? 만약 잘하는 선수가 있는데 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그 선수를 뛰게 하지 않는 감독이 있을까? 모든 건 성적이 좋다 보니까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안젤코는 “보스니아인들은 유전적으로 바위 같은 체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부상만 없다면 지금처럼 뛰는 건 큰 문제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주위에서 자신의 경기 출전과 관련해 ‘혹사’ 운운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고 했다. 선수의 출전 여부는 오직 감독의 고유 권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팀의 용병들에 비해 발군의 활약을 보이고 있지만 안젤코는 “내가 가장 나이도 많고 몸무게도 제일 많이 나가고 키도 가장 적다”며 자신의 단점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안젤코를 긴장시키는 용병이 있는지를 물었다.
“선수보단 현대캐피탈을 만나면 다른 팀보다 더 긴장하고 코트에 들어간다. 현대는 선수 개별적으론 최고의 선수들만 모인 것 같다. 그러나 팀 전력면에선 삼성이 한수 위다. 배구는 개인기보다 조직력이다. 그래서 많은 감독들이 삼성의 조직력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
안젤코는 한국 배구에서 가장 성공한 용병으로 꼽히는 숀 루니(전 현대캐피탈 소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숀 루니처럼 훌륭한 선수와 함께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며 또 다시 남다른 승부욕을 발휘했다. “지난해 숀 루니가 현대에 남아 있었다면 진검 승부를 가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말한 것.
“지난 번에 왔던 여자친구는 같은 배구 선수라 편한 점도 있었지만 워낙 리그가 다르다 보니까 연락하기도, 얼굴 보기도 어려워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다. 이번에 새로 만난 여자친구는 지난 번 휴가 때 보스니아에서 알게 된 대학생이다. 수의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지금 대학 4학년생이고 앞으로 2년을 더 공부해야 한다. 키가 190cm가 넘고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안젤코는 여자친구의 꿈이 수의사라고 소개하면서 둘 다 키가 커서 만약 결혼까지 이르러 자식을 낳게 된다면 배구 선수를 시켜도 될 것 같다는 농담으로 기자를 또 한 번 웃게 만든다. 통역 손정식 씨는 안젤코의 여친을 사진을 통해 미리 봤는데 안젤코가 반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라고 귀띔한다.
인터뷰 말미에 안젤코에게 한국에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다. ‘안젤코식’ 답변을 예상한 기자는 ‘두 번째 우승을 하고 싶다’는 얘기는 빼달라고 미리 주문했다.
“언젠가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됐을 때 숀 루니처럼 안젤코란 이름도 영원히 기억되고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으면 좋겠다. ‘최고의 용병, 안젤코’였다고 말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