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물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었다. 그것도 그냥 잡은 것이 아니었다.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개를 오토바이에 묶어 마을을 돌고 돌았다.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그렇게 잔인하게 살육당한 후 식구들의 보신탕이 된, 너무나 섬뜩해서 기억에서도 지워버린 그 사건이 시간이 흐르고 흐른 후에 꿈을 통해 찾아온 것이다.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그녀로 인해 그녀의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남편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세상과의 관계가 불편해진다. 아니, 불편을 넘어 소통 불가능이다. 그녀의 채식은 육식을 하지 않는 자의 부드러움이 묻어나는 그런 채식이 아니다. 악몽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그녀의 채식은 고집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 또한 그 누구의 이해를 구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 이상한 채식인 것이다.
그녀의 채식은 지난 날 잔인한 육식의 현장에서 자기가 지켜주지 못했던 생명에 대한 참회이기도 하고, 그 생명을 위한 제사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렇게 우울하고 자폐적인 것은 그녀가 삼킨 것이 그랬기 때문이다. 가족으로 살았던 개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신을 위해 잡은 아버지, 잔인하게 죽어가는 개의 고통을 맛으로 느끼는 식구들, 그런 상황에서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나’, 더구나 그 ‘나’는 개에게 물린 나다. 그래서 개의 개죽음에 빌미를 제공했을지도 모르는 ‘나’ 아닌가.
내가 삼켰으나 삼킨 줄도 몰랐던 고통이 있다. 마음에 생채기를 냈으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잊고 있었던 것들, 그것이 어느 날 불쑥 올라와 내 삶을 휘저을 때, 어쩔 수 없다, 그 혼돈을 겪는 수밖에. 혼돈이 찾아온 것은 그 혼돈을 감당할 힘이 생겼다는 증거다. 이제 명치끝에 갇혀 있었던 고통을 토해낼 힘이 생겼다는! 그렇게 소화할 수 없었던 과거를 토해내고 토해내야 비로소 시원해지고 평온해지고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지지 않겠는가.
큰상을 받고나니 ‘채식주의자’가 정신없이 팔린다고 한다. 좋은 일인데 왜 살짝 씁쓸해질까. 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좋은 책을 찾아가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책에도 책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지만 분명 좋은 책은 내 속도를 유지하며 함께 사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