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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병현은 KCC 이적 후 눈에 띄게 향상된 성적으로 허재 감독과 팀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정지원(정): 전자랜드에선 10득점 이상 게임이 4경기에 불과했는데 KCC에 와선 4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다 두 자리 득점에 성공했군요. 이처럼 득점이 급상승한 이유가 뭘까요?
강병현(강): 출장시간 문제인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전자랜드는 ‘가드왕국’이잖아요. 황성인, 정병국, 정영삼 등 뛰어난 가드 선배들과 포지션 경쟁을 벌여야 했어요. 짧은 시간 안에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조급해지면서 자꾸 범실을 저지르게 됐죠. 에러가 많아지면서 출장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그 만큼 자신감도 떨어졌어요. 여기서는 ‘자신감 넘치게 경기하고 슛도 과감하게 쏘라’는 허 감독님의 배려가 큰 힘이 됐어요. 또, 수비의 귀재들인 추승균, 신명호와 함께 뛰어보니 너무 편해요. 저야말로 그 형들 덕택에 무임승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웃음).
정: 지난 1월 15일 KT&G전에서는 프로 개인 통산 최다인 24점으로 팀 승리를 주도하면서 경기 최다득점자가 됐어요.
강: 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득점을 많이 한 줄 몰랐는데요. 경기 후에 인터뷰를 하면서 알았어요. 사실 대학시절(중앙대학교)에도 그렇게 많은 득점을 한 적은 별로 없었어요. 그날 정말 기뻤는데 제가 많이 넣어서라기보다는 팀이 이겨서 좋았던 것 같아요.
정: 이제 다 지난 얘기지만 작년 12월 19일 전자랜드에서 KCC로 트레이드됐을 때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을 거예요.
강: 제 인생의 최대 위기라고 느꼈어요. 한마디로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죠. 물론 고교시절과 대학시절에도 때때로 슬럼프는 있었지만 그건 비교조차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전 너무 놀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빨리 트레이드된 경우도 있었나요”라고 물을 정도로 충격이 컸어요. 그 때가 입단한 지 겨우 10개월밖에 안된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주변에서는 오히려 저한테는 더 잘 된 일이라고 위로해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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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전 사실 1순위 지명권을 보유한 네 팀 중 가드가 제일 취약한 KCC가 제게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네 팀 중 어느 팀이든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으면 무조건 하승진을 지명할 거라고 봤고요. 그런데 제게 관심을 보였던 KCC가 1순위 지명권을 확보하는 순간 저는 순위에 관계없이 전자랜드로 가게 될 것임을 예견했어요. 김태술이 있는 SK는 김민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들었고 동부는 윤호영을 점찍었다고 들었거든요. 결국 KCC가 하승진을 지명하면서 저는 예상대로 전자랜드로 가게 됐죠.
정: 소속팀 허재 감독이 일찌감치 강병현 선수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사실인가요?
강: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제가 고3 때 모 신문사에서 스포츠 유망주 기사를 다루는 코너가 있었어요. 당시 저를 취재한 기자가 원주 삼보의 플레잉 코치였던 허 감독님을 만나게 주선해줬어요. 그 때 허 감독님이 제 슛 폼도 교정해주시고 농구에 관한 조언도 해주셨죠. 당시 신문기사의 제목이 아마도 ‘강병현, 제2의 허재’인가 그랬는데 그게 와전된 것 같아요(웃음).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저는 솔직히 낯 뜨거워요.
정: 부산 중앙고 시절 두각을 나타냈던 강병현 선수가 연대와 고대를 제쳐두고 중앙대로 진학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강: 과거 기아에서 신화를 창조했던 ‘허동택 트리오’가 모두 중앙대 출신이라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더욱 결정적인 건 제가 고1 때 안성에 있는 중대에서 훈련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4학년이던 김주성(동부), 박지현(LG) 등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과일을 깎아주고 라면을 끓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완전히 반해버렸죠. 중대는 1, 2학년생들은 쉬게 하고 최고참인 4학년생들이 바닥을 쓸고 청소하는 특유의
전통이 있거든요.
정: 신인상 후보인 강병현 선수가 보는 가장 강력한 신인상 후보는 누구인가요?
강: 김민수(SK), 기승호(LG)와 천대현(모비스) 등이 후보가 아닐까요? 그리고 부상에서 복귀한 우리 팀의 하승진 선수도 당연히 강력한 후보라고 생각해요.
강병현은 활발한 외양과는 달리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도 많은 편이라고 고백한다. 지난 12월 트레이드 때 강병현은 1년 치 전화를 한꺼번에 다 받은 것 같다고 하니 얼마나 주위의 걱정들이 컸었는지 추측이 된다. 그러나 정작 기다렸던 단 한 사람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바로 아들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온 강병현의 아버지였다. 그 다음날 아버지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괜찮대이. 잘 됐대이. 더 잘하면 되는기라”는 세 마디를 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강병현은 훗날 “트레이드 날 아버지가 혼자 술잔 앞에서 네 걱정에 하염없이 우시느라 네게 전화도 걸지 못 했다”는 고모의 증언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결국 그 눈물 이후로 강병현은 달라졌고 강해졌다. 많이 울었건만 아직도 강병현은 울고 싶다. 이제는 가슴이 철렁한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가슴이 찡한 감격의 눈물을.
CJ미디어 아나운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