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윤셔가 선보인 헬조선 탈출 보드게임 ‘부루반도’. 출처=흙수저 갤러리
디시인사이드의 주요 서비스는 주제별 게시판인 ‘갤러리’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는 본래 일정 수 이상의 이용자들이 특정 주제의 갤러리 개설을 요청하면 운영자가 승인해 오픈된다. 때문에 연예인들은 자신의 갤러리가 신설되는 것을 인기의 척도로 여기기도 한다.
디시인사이드 관리자는 “갤러리는 이용자분들의 요청을 참고하거나 다각도의 판단 하에 개설되고 있다”며 “흙수저 갤러리의 경우 당시 사회적 큰 이슈로 개설됐다”고 전했다. 결국 흙갤은 블랙코미디 같은 현실 속에서 N포 세대가 가지는 낙관적 태도의 발현인 셈.
흙갤은 탄생 직후부터 그야말로 ‘핫’했다. 개설 첫날에만 900여 건, 5일 만에 1만 6500여 건의 글이 게재됐다. 유저들은 가난을 견뎌내기 위한 생존 팁을 공유하기도 했다. 무료급식소부터 문화누리카드, 긴급생계비지원, 겨울철 에너지바우처까지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정보가 쏟아졌다.
갤러리가 생긴 지 3일째 되는 날부터는 ‘흙통령(흙수저+대통령)’ 선출을 위한 인증글도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한 유저는 집 밖에 있는 공동화장실을 찍어 올렸고, 다른 유저는 생계곤란으로 병역이 면제된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유저들이 천장과 벽에 곰팡이가 피거나 물이 새는 사진, 맨밥과 김치만으로 점심을 때우는 사진을 올리며 자신이 진짜 흙수저임을 인증했다.
흙갤 유저들은 ‘흙수저 빙고’ 등을 개발해 함께 즐기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출처=흙수저 갤러리
흙갤의 흥행 이유에 대해서는 “유저들이 서로 동질감과 위로를 느낀 것 같다”며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힘들다는 것에 위안을 얻고 개인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흙갤 유저들은 ‘흙수저 빙고’ 등을 개발해 함께 즐기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가난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흙수저를 자처하거나 ‘주작(없는 사실을 꾸며 만듦)’하는 이들의 인증글에는 ‘기만자’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부유함을 과시하며 흙갤 유저들을 조롱하는 이들이 늘면서,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된 것. 이후 기만자에 대한 유저들의 경계심이 고조되며 상대적으로 덜 가난해 보이는 사연이나 인증샷을 올리는 글에도 기만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가난한 알바생의 초라한 점심’이라며 점심도시락을 인증한 글에는 “어묵볶음에 계란프라이까지 있으니 기만자”라는 댓글이 달렸다. 한 유저는 “갤질하는 기만자들에게 일침”이라는 제목으로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흙갤은 지난해 말 전성기를 누리며 두 명의 능력자를 배출했다. ‘가난생존법’을 전파한 ID 가난그릴스와 ‘부루반도’를 선보인 ID 윤셔가 그 주인공이다. 가난그릴스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Man vs. Wild>와 <Born Survivor> 시리즈로 유명한 생존 전문가 ‘베어그릴스’를 패러디한 닉네임이다. 가난그릴스는 더없이 절박하고 눈물겨운 생존 팁을 알려주며 화제를 모았다.
ID 가난그릴스가 공유한 ‘가난생존법’. 출처=흙수저 갤러리
윤셔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즘 보드게임 ‘부루반도’를 선보였다. 부루반도는 등장과 동시에 청년층의 공감을 사며 SNS를 강타했다. 그는 “부루반도란 지옥불처럼 활활 붉게 타오르는 반도를 말한다”고 소개했다. 말판에는 자살1위, 최저시급, 고용불안, 무능정치, 정부불신 등을 새겨 넣었다. ‘탈조선’과 ‘금수저’ 말판은 각각 비용 2억 원과 자산 20억 원이 있어야 가능해 없느니만 못하다.
흙갤이 번창하자 다양한 해프닝을 양산했다. 아프리카TV의 한 BJ는 ‘흙수저 경연대회’를 열었다가 융단폭격을 맞기도 했다. 그는 “인증샷을 보내면 투표를 통해 쌀 20㎏을 주겠다”며 “삶의 애환을 담은 여러분들의 사진을 기다린다”고 모집글을 올렸다. 모집글을 접한 누리꾼들은 댓글로 분노를 표출했다. 이후 해당 BJ가 흙갤에 사과문을 올리고 기부를 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최근 흙갤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상당수 유저들이 갤러리보다 SNS메신저에서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게 됐기 때문. 유저들이 갤러리에 새 글을 올리지 않고, 덩달아 게시글을 구경을 하러오는 이들도 줄면서 흙갤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여다정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