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몸살을 앓고 있다. 1, 2차 원장 공모 불발로 최근 3차 공모에 들어갔으나 ‘낙하산’ 인사 내정 의혹 등이 불거지며 파장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표준과학연 전경.
[일요신문] 한국표준과학연구원(표준연)의 원장직 공모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잇따라 무산되자 그 배경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2차례 원장선임에 실패한 표준연은 허탈감속에서도 원장의 업무공백 장기화에 따른 연구현장의 혼란을 내심 우려하고 있다. 급기야 보다 못한 공공연구노조가 ‘정치권 개입’의 개연성을 주장하며 원장 선임을 맡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과기연)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갈등은 심화될 전망이다.
당초 표준연의 원장 공모는 지난 3월 신용현 전 표준연 원장이 20대 총선 국민의당 비례대표 신청을 위해 돌연 사퇴하면서 시작됐다.
원장 선임 절차는 원장후보자심사위원회의 후보 선별과 함께 이사회의 최종투표로 진행된다. 과기연 이사장과 이사(4명), 외부전문가(2명)로 구성된 원장후보자심사위원회가 지원자들에 대한 서류 및 면접심사를 거쳐 후보자 3명을 선정, 이사회에 추천한다.
이사회는 이들에 대한 면접과 함께 투표를 실시해 과반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다시 2명의 후보로 압축해 결선투표를 치른다. 결선투표에서 선정된 최후의 1인은 다시 찬반 투표를 통해 과반표를 얻어야만 선임이 최종 확정된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31일 실시된 1차 공모에는 12명의 후보가 지원했다. 원장후보자심사위원회는 원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박현민 표준연 부원장을 포함한 3명의 후보를 선별, 이사회에 추천했다. 이들은 모두 표준연에 재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회는 이들 후보 중에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 재공모를 결정했다. 이에 공공연구노조 표준연 지부는 이사장실을 찾아가 후보들에 대한 충분한 검증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노조의 이같은 반발은 원장선임 절차가 예년과 달리 급하게 진행돼 충분한 인사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과기연은 노조의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1차 공모가 종료된 다음날인 5월 10일 2차 공모에 돌입했다. 그러나 2차 공모에서도 원장선임에 실패했다. 이번에도 이사회에서 과반표를 얻은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이사회에 추천된 후보들 모두 1차와 마찬가지로 내부 인사들이었다. 1, 2차 공모에서 내부인사들이 모두 낙마하자 표준연 내에선 “내부승진은 없다는 것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외부 내정인사 영입을 위해 과기연 이사회가 벌이는 ‘암묵적 사인’이라는 추측마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같은 반발을 의식한 과기연은 원장선임 추진계획안을 새로 마련해 차기 이사회에 상정키로 했으나, 지난달 31일 게시한 3차공모 공고도 공고를 낸 매체를 종전 1곳에서 3곳으로 늘렸을 뿐 별반 다름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2차례에 걸친 원장직 공모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산되자 20대 총선 이후 공공기관에서 ‘낙하산 인사’가 잇달아 단행되는 등 “표준연도 그중 하나일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공공연구기관의 기관장 선임에는 통상 2~3개월이 소요되나 이번 표준연 원장선임의 1차 공모는 공고게시(3월 31일)부터 최종결과발표(5월 9일)까지 40일이, 서류마감일(4월 20일)부터 이사회 추천 후보압축까지(5월 2일)는 고작 12일 걸렸다.
2차 공모는 1차 공모가 불발된 바로 다음날인 5월 10일 공모를 시작해 불과 16일 만인 26일 최종결과가 나왔다. 이사회 추천후보 압축까지는 단 나흘로 1차 공모보다 3배 빠른 속도다. 선임절차가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로 졸속심사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눈치다. 급기야 노조가 이사장실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표준연 관계자는 “전임 원장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공석이 된 특수한 상황임에도 보통 2개월이 걸리는 선임절차가 2개월 만에 3번이나 재공모를 실시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신용현 전임 원장의 경우 2개월가량의 공모절차를 거쳐 한 번에 선임됐다”며 “이사회도 후보들의 품성, 사상, 도덕성, 재산의혹 등을 면밀히 검증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인 것으로 안다.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되레 반문했다.
이에 대해 과기연 심사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원장의 업무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속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사회의 졸속심사가 ‘낙하산 인사’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뒤따르고 있다. 1, 2차 공모에서 이사회에 추천됐다가 낙마한 후보들이 모두 내부인사들로 정부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앉히기 위한 사전포석이라는 설명이다.
노조는 “보이지 않는 손, 청와대의 공공연구기관 다잡기” 등을 들며 노골적으로 ‘낙하산 인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공공연구노조 표준연 지부는 성명서를 통해 “두 차례에 걸쳐 3배수의 원장후보들이 모두 낙마한 것은 친정권 출신이나 청와대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찾고 있거나 내정하려고 하고 있다는 반증에 지나지 않는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신용현 전임 원장이 야당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함에 따라 집권세력이 암묵적으로 우리 연구원을 정치적으로 압박 및 탄압하며 기관 길들이기를 통해 표준연을 고사시키려 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연구원에 대한 노골적인 보복성 정치탄압”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표준연의 이번 공모사태와 관련해 공공연구기관의 선임과정, 역할과 기능 등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우선 공공연구기관의 특성상 기관장은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김경중 공공연구노조 표준연 지부 위원장은 “연구기관의 원장은 기본적인 전문성이 없으면 어려운 자리다. 표준연은 군사정권 때 한번 외부인사가 내려온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내부에서 원장이 선임됐다”며 “특성표준의 컨트롤타워역할 제대로 숙지 및 판단하고 결정을 하려면 전문성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책임성 있는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만들고 시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장선임의 마지막 절차인 이사회의 승인 시스템도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원장으로 최종선임 되기 위해선 총 15명의 과기연 재적이사 중 8명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하나 재적이사 15명이 한 번에 모이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 지난 표준연 1차 공모에선 9명이, 2차 공모에는 8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원장으로 선임되기 위해서는 참석한 이사들의 표를 모두 얻어야 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원장 결정방식을 두고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표준연의 한 관계자는 “재적 위원 과반수이상이면 위원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날짜에 이사회를 여는 게 당연하다”면서 “통상 회의가 출석 위원의 과반수로 진행하는데 과기연은 굉장히 적은 인원이 참여하는 이사회인데도 재적위원의 과반수로 정하고 있다”면서 이사회 운영의 비합리성을 꼬집었다.
한편 표준연 원장 공모를 계기로 대덕특구 공공연구기관들 사이에서 ‘낙하산’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은 지난 4월 7일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 사무국장직 공모에 들어가 미래부 현직서기관이 유일하게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항우연 노조는 이에 “정부가 낙점한 인물, 전문성 없는 인사”라며 크게 반발했는가 하면, 한국과학기술원(KAIST)도 지난 22일 나노종합기술원장으로 현 원장이자 박근혜 후보 대선캠프 출신인 이재영 교수의 연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 원장은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조직총괄본부 과학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대통령의 과학정책공약 수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표준연 원장선임을 맡고 있는 과기연 이상천 이사장 역시 영남대 총장시절부터 영남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근혜 대통령과 남다른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 나선 박근혜 후보의 과학기술 자문위원을 지낸 데 이어 2012년 대선에서도 박근혜 후보 지지성명을 내기도 했다.
한국 과학의 메카로 세계적인 명성과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대덕특구가 표준원 원장 등의 인사 선임을 둘러싼 잡음으로 때 아닌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 속에 표준연 원장 3차 공모에서도 원장 선임에 실패하거나 정치권 관련 인사가 선임된다면 대덕특구 공공연구기관의 거센 반발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영만 기자 ilyod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