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손, 또는 ‘이방인’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나누는 정도였다. 먼저 악수를 건넨 사람은 이날 참석자 가운데 주요 인사 몇몇뿐이었다. 그마저도 “오셨습니까”라는 짧은 인사가 전부였다.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행사의 안내서에도 후손의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다. 뒤늦게 사회자가 후손의 이름을 불렀다. 모든 참석자가 지나간 뒤였다. 후손은 그제야 조상의 묘에 꽃을 놓을 수 있었다.
차미리사 여사의 외고손자 박동석 씨가 추도식에서 분향헌화를 하고 있다.
차 여사는 현재 독립 운동가이자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동시에 1920년 지금의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학교를 세운 설립자다. 그는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친일파에 학교를 넘긴 뒤 설립자 이름에서도, 역사에서도 지워졌다. 사후 47년이 지나서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며 그의 존재는 다시금 세상에 알려졌다.
앞서의 후손은 차 여사의 외고손자 박동석 씨다. 차 여사가 자신의 할머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건 훈장이 추서된 지 8년이 지난 뒤였다. 보훈처로부터 유족임을 입증 받고, 훈장을 전수 받기까지 다시 3년여의 시간이 더 걸렸다. 이 과정에서 박 씨를 제외한 누구도 그가 차 여사의 후손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르지 말라는 이들은 덕성여대 관계자들이었다. “차미리사의 뜻과 정신을 계승한다”던 그들은 후손을 외면하려 했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박 씨는 그 이유를 하나씩 알아갔다. 덕성여대에서 차 여사의 후손은 없어야 했고, 나타나면 안됐다.
# 사라진 차 여사의 딸
박 씨는 어린 시절부터 떠올렸다. 아버지를 통해 듣던 말이 있다고 했다. 집은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 늘 배가 고팠다. 그런 박 씨에게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살아도 우리는 독립 운동가의 후손이다. 어딜 가든 어깨 펴고, 고개 숙이지 말고”라고 말했다. 어린 박 씨는 아버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사진 한 장도 없으니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닿지도 않았다. 그냥 힘을 내자는 말이겠거니 했다.
박 씨는 어른이 됐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태어났다. 그제야 가족이 궁금해졌다. 어린 딸에게도 ‘뿌리’를 설명해주고 싶었다. 문득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 2010년, 전화를 걸어 조상의 이름을 물었다. 아버지는 ‘김미리사’라고 말했다. 덕성학원의 설립자라는 말과 함께였다. 맥이 풀렸다. 덕성학원 설립자는 독립 유공자 ‘차미리사’로 기록돼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김 씨가 맞다고 했다. 그 기록이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1928년 2월 1일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 차 여사가 직접 기록한 기고문 ‘춘풍추우(春風秋雨) 50년간에 다루다한(多淚多恨)한 나의 역사(歷史)’에는 자신의 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었다. 차 여사는 “김미리사. 나의 본성은 차 씨. 세상 사람들이 나를 김미리사라고 부르고 나 또한 그렇게 행세했다. 가난한 놈은 성도 없다고 나는 약자인 여자로 태어나 여필종부(女必從夫: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좇아야 한다) 습관에 의지해 나의 본성을 떼어 버리고 남편인 김 씨의 성을 따랐다”고 기록했다. 남편의 성인 ‘김’을 사용한 것일 뿐, 아버지가 말한 김미리사와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는 동일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증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보훈처도 박 씨에게 “정황만으로는 후손임을 인정할 수 없고, 훈장 전수도 어렵다”고 밝혔다. 객관적인 자료가 더 필요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가족관계를 확인할 족보, 호적 등 남아있는 기록물이 없었다. 유일한 자료는 차 여사가 독립 유공자로 재조명되며 공개된 차 여사 제적등본 등이었다.
그런데 등본에 기록된 차 여사의 딸은 김 씨인 데 반해 박 씨의 증조할머니는 서 씨 성을 쓰고 있었다. 각기 다른 성을 쓰고 있는 두 여성이 같은 사람임을 확인해야 했다. 지난 2010년 1월, 박 씨는 덕성여대로 처음 발길을 옮겼다. 덕성여대의 실제 설립자를 찾아 연구해, 50여 년 만에 세상에 알린 한상권 사학과 교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덕성여대 내부에 건립된 차미리사 기념관.
덕성여대에는 차미리사 기념관이 설립돼 있다. 차 여사가 2002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이후 덕성여대는 학교를 설립한 차미리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다. 지난 2003년 4월 19일 차미리사 연구소가 개설됐고, 같은해 12월 23일 차미리사 기념관이 설립됐다. 이곳에는 강의실과 교수 연구실 등이 함께 있다.
박 씨가 찾은 곳은 차미리사 기념관 내에 있는 차미리사 연구소였다. 후손임을 밝히자, 당시 연구소장은 “그런 분들이 많이 찾아 온다”며 앞서의 한상권 교수가 집필한 차미리사 전집 두 권을 건네며 돌아 가라고 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한 교수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당시 박 씨가 유족임을 입증하고 훈장을 전수 받겠다고 하자 한 교수는 돌연 “훈장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 교수는 이어 “가족 인정을 받고 말고는 알아서 하시고, 훈장은 찾아가지 말라”며 “그 훈장이 왜, 누가 만든 훈장인데 그걸 가족이 찾아가나. 개인 차미리사가 아닌 덕성여대 학생들을 위한 훈장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 사학법 개정과 덕성여대 분규
한 교수가 훈장 전수를 반대한 이유를 확인하려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일각에서 ‘개악’이라고 표현했던 사립학교법 개정부터다. 실제로 사학법은 헌법재판소 출범 이래 가장 많은 위헌심판이 청구된 법률 중 하나다. 1963년 제정된 이후 현재까지 40여 차례가 넘는 개정을 거듭했다.
특히 1990년과 1999년 사학법 개정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이 일었다. 사립대학 이사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법인협의회의 로비 의혹이 불거진 상태에서 민자당 단독으로 통과된 1990년 사학법 개정은 ‘대학 설립자 직계 존·비속의 총학장 임명 허용’과 ‘총장 권한이던 교수 및 직원 임면권의 이사회 이관’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 때문에 “설립자 가족이나 이사가 학교를 사유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따랐다. 여기에 1999년 개정안은 비리사학으로 지정되면 파견하는 임시이사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면서 “비리 관련 이사의 재단복귀 길을 터준다”는 비판이 따랐다. 그리고 그 직접적인 결과는 곧바로 덕성여대에서 불거진다.
# 쇠사슬에 묶인 학교
당시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박원국 덕성여대 전 이사장은 학교 안팎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박 전 이사장은 ’학교 재산을 세습하며 사유화한 독재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횡령, 배임 등 온갖 비리 의혹이 제기됐다. 특히 그는 앞서 개정된 사학법의 교수재임용제도를 통해 재단을 비판한 교수들을 직접 해직시켰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교수 해임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면서 사학과 교수 ‘0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1997년, 한상권 교수가 일방적으로 해직되면서 덕성여대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수업 방해, 폭력 등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제기한 소송만 10건을 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교육부가 감사에 나섰고, 그동안의 비리 146건을 적발해 이사장 승인을 취소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박 전 이사장은 이사장 승인취소가 부당하다며 교육부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2000년 최종 승소했다. 교육부가 마지막 계고장을 보낸 뒤 법적기한인 15일을 기다리지 않고 8일 만에 해임했다는 ‘절차상의 하자’가 승소 배경이었다. 절차문제로 법정논란이 벌어지는 사이 정작 해결해야 할 위법사항 시정조처는 흐지부지됐고, 2001년 박 전 이사장은 학교로 돌아왔다.
박 전 이사장과 비리에 연루된 재단 관계자들이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은 덕성여대 학생 5000여 명 가운데 3700여 명은 투표를 통해 수업거부를 결정했다. ’박원국 이사장 퇴진, 관선이사 파견‘을 수업복귀 조건으로 걸었다. 학내 분규는 극심해지고 과격해졌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덕성여대의 또 다른 교수는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농성 과정에서 책상과 의자를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자, 학교 측은 밤새 용접하고 쇠사슬로 묶어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로 돌려보냈을 정도”라고 말했다.
# 남해교가 무너지고 근화교가 세워지다
덕성여대 분규가 진행 중이던 지난 2001년 8월 15일, 집중호우로 덕성여대 정문 앞 남해교가 붕괴됐다. 무너진 남해교는 당시까지 덕성학원 설립자로 알려졌던 송금선의 호 남해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송금선은 황국신민화 광풍이 한창인 1940년 8월,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송금선 취임에 대해 “축하할 일”이라며 성명서를 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1952년 1월, 덕성학원의 모든 권한과 재산이 송금선 집안으로 넘어갔다. 이후 송금선의 부친 송우영과 남편 박준섭이 각각 2대, 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초대 이사장으로 다시 4대 이사장이 된 송금선은 1970년 8월 15일부터 재직하다 1977년 8월 15일 아들인 박원국 전 이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학교가 송금선의 부친-남편-본인-아들로 세습된 것이었다.
실제로 송금선은 덕성학원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당시까지 덕성학원 총동창회는 “송금선 박사가 덕성여자대학교를 설립해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덕성 학원분규 과정에서도 박 전 이사장 측 인사들은 “덕성여대가 70~80년대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박원국 이사장 덕분이다. 학교를 위해 재정적 뒷받침은 물론, 헌신까지 한 박원국 이사장을 두고 독재라 부르며, 탄압 운운하는 것은 학교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경영권은 설립자와 그 후손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차미리사 여사가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앞서 1997년 재단 측에 의해 교수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했던 한상권 교수가 과거 자료를 들춰보다 우연히 차미리사 여사의 기록을 발견한 것. 한 교수는 “송금선이 친일파라는 것은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차미리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역사를 바로 잡아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찾아보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정확이 알아보자라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연구는 3년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한 교수는 차 여사가 1920년 전국순회 강연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열었던 부인 야학강습소인 근화학원이 덕성여대 전신임을 밝혀냈다. 1940년 학교장직을 떠날 때도 조선총독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정황도 찾았다. 이러한 사실은 학회에 발표됐고, 훈장 추서 작업도 시작됐다. 학내 분규 과정에서도 박 전 이사장 등 구재단을 몰아낼 역사적 명분이 됐다. 그동안 구재단 측이 “박 씨 일가에 ‘사학 관리권’이 있다”고 주장해온 데 맞서 학생과 교수, 교육‧시민‧사회 단체들이 “설립자는 따로 있다. 박 씨 일가는 친일‧비리‧족벌재단에 불과하며 자격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덕성학원 분규는 지난 2001년 교육부가 관선이사 4명 파견을 결정하면서 서서히 마무리됐다. 이후 차미리사는 덕성학원의 실제 설립자로 알려지게 된다. 앞서의 붕괴된 남해교의 자리에는 현재 근화학원의 이름을 따온 근화교가 들어서 있다.
그렇지만 2010년에 다시 사학법이 개정되면서 박 전 이사장 일가가 다시 학교 재단으로 돌아온다. 박 전 이사장의 조카와 측근 인사들이 이사로 선임된 것. 이로 인해 덕성여대 내부에선 박 전 이사장이 이끌던 2001년 이전이 구재단이라 불리고 2010년 이후 돌아온 박 전 이사장의 조카와 측근들은 신재단이라 불린다.
# 유족 입증
차 여사의 후손 박 씨는 “이런 과정을 거쳤으니 실제 후손이 나타나면 안됐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씨 말에 따르면 한 교수 측은 ‘투쟁’과 ‘민주화’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 교육‧시민‧사회 단체의 구심점이 됐던 차 여사와 훈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또한 구재단 측 역시 차 여사 후손의 등장으로 ‘설립자의 자손’이라는 명분에 금이 간다는 것. 실제로 박 씨는 앞서의 훈장 전수 과정에서 학교 측으로부터 어떠한 정보도, 도움도 얻지 못했다.
지난 2013년, 박 씨는 1995년 6월 3일 발행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서 차미리사 여사의 부고를 발견한다. 덕성학원과 총동창회 등이 낸 이 부고를 보면, 차 여사의 딸 김 씨와 그의 남편, 조카 등의 이름이 함께 기재돼 있다. 이곳에서 차 여사 딸인 김 씨의 남편은 후손인 박 씨의 증조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보훈처도 이를 인정해 박 씨를 차 여사의 후손으로 인정하고 지난 2014년 훈장을 전수했다.
박동석 씨가 지난 2014년 보훈처로부터 전수 받은 훈장
# 여전히 이방인
덕성여대에선 여전히 차 여사를 사이에 두고 한 교수와 재단 측이 다른 행보를 보인다. 앞서의 추도식도 두 번에 걸쳐 따로 열렸다. 지난 5월 26일 한 교수는 학교법인과는 별개로 학생들과 함께 미리 추도식을 진행했다. 또한 학교법인은 차 여사의 기일에 맞춰 매년 6월 1일 추도식을 연다.
차미리사 여사 추도은 두 번 열린다. 왼쪽은 지난 5월 26일 한 교수와 학생들이 진행한 추도식. 오른쪽은 지난 6월 1일 덕성학원이 주최한 추도식이다. 덕성학원 이사장, 덕성여대 총장, 총동문회 회장 등 인사가 참석했다.
박 전 이사장 일가의 권리 승계권 갈등 사이에서도 차 여사의 존재가 부각된다. 박 전 이사장은 지난 2010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현재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박 전 이사장 대신 최 아무개 덕성여대 교수를 이해관계자에 포함시켰다. 최 교수는 ‘박 전 이사장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며 2010년 박 전 이사장이 쓰러진 뒤 혼인신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신재단을 중심으로 한 박 전 이사장의 가족들이 혼인무효소송을 낸 결과, 1심에선 혼인 무효 판결이 났지만, 2심에서는 혼인이 유효하다며 최 교수 측의 일부 승소 판결이 나왔다. 덕성학원 관계자는 “최 교수 측은 박 전 이사장과 같이 차 여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 전 이사장의 조카이며 현재 상임 이사인 박 아무개 이사는 차 여사의 정신을 승계해 운영하겠다는 입장”이라고 귀띔했다.
훈장 전수 이후에도 학교 측의 후손에 대한 인정은 어려워 보인다. 학교 관계자들은 후손을 경계하거나 선을 긋고 있다. 한 교수는 “덕성학원에서 차 여사에게 담긴 의미는 남다르다. 독립 유공자 지정과 훈장 추서도 당시 학교 구성원들의 투쟁과 노력의 결실이다. 현재 덕성여대는 차 여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뜻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차 여사의 후손들이 관여한 일은 없다. 훈장은 학생들의 것이다. 후손이라도 가로챌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학교법인 덕성학원 관계자는 후손에 대해 “지금 차미리사 여사를 설립자로 모시고 있지만, 사실상 야학을 설립하셨고, 덕성여대는 후임 교장과 그 자손들이 일궈냈다. 차 여사의 후손과는 크게 관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박 씨는 “학교 관계자들이 경계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며 “후손임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차미리사 여사는 누구? 야학 운영하며 여성계몽 앞장 차미리사 여사는 1879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다섯 아이를 모두 잃고 50세가 되던 때 얻게 된 아이가 딸이란 이유로 ‘섭섭이’라 불렀다. 17세에 결혼해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이후 그의 삶에는 파동이 멈춘 적이 없었다. 사회 개화운동의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미리사’란 이름은 그가 조선 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 뜰 무렵, 교회에서 받은 세례명이다. 23세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고학하면서 열병을 앓은 뒤, 치명적 후유증에 시달리다 청각장애를 얻었다. 34세이던 1912년 미국 유학을 거쳐 귀국한 그가 헌신한 운동은 여성교육 사업이었다. “조선사람들에게는 고등교육보다 보통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보통교육론’을 주창했다. 문맹을 떨칠 길이 없는 당시 여성들을 위해 그가 주장한 교육제도 개혁안이었다. 실업교육론을 현실화하는 데 주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여성들이 사회에서 소외됐으며 굴욕적 현실을 벗어나는 길은 기술교육을 통한 경제자립뿐”이라는 지론을 펼치며 교육운동의 초점을 맞췄다. 1920년 전국순회 강연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부인 야학강습소를 열었는데, 그 이름이 근화학원으로, 지금의 덕성여대 전신이다. 근화학원은 1925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거듭났으며, 학생들은 대부분 여성, 특히 가정 주부들이 대상이었다. 60세 이던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칭했다. 임종 순간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며 애석해 한 그는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다. 70세이던 1948년 성명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남북협상을 서원함’의 발표에 참여할 정도로 통일을 갈구했다. 뒤늦게 2002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그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평생 차미리사를 지켜보며 후견인 역할을 했던 개화파 윤치호는 일기에서 “서울에 있는 한국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한 여인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남자나 여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문] |
덕성여대 재산은? 토지 1000억+예금 1200억…손꼽히는 부자 대학 덕성여대는 국내 사립대학 가운데 보유 재산이 많은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이 정보공시 사이트인 ‘대학 알리미(www.academyinfo.go.kr)’를 통해 공개한 2015년도 대학정보 공시를 보면, 덕성여대 법인 덕성학원의 수익용 기본재산은 373.2%(2200억 원)를 기록했다. 전국 평균은 56.3%다. 176개 대학 중 수익용기본재산 확보율이 100%를 넘는 곳은 28개다. 수익용 기본재산은 토지와 건물·유가증권·신탁예금·기타재산 등을 합친 것이다. 대학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보유 중인 재산이다. 대학설립·운영규정에서는 1년간의 대학운영 수익 총액에 해당하는 재산을 수익용으로 보유할 수 있다. 또한 한국사학진흥재단의 사립대학회계정보시스템을 보면, 덕성학원은 동국대 법인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토지 32.31㎢(118건)로, 공시지가는 1000여 억 원이다. 다만 토지 수익률은 0.4%로 현저하게 낮다. 현금 보유액도 높다. 신탁 예금액은 1200여 억 원이다. 지난 2014년 김희국 새누리당 의원은 “학교시설로 사용할 토지도 아니고 수익도 나지 않는 땅과 건물을 과도하게 보유하고 있으면서 재단전입금도 미미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현재 덕성학원은 최초로 법인 수익 사업을 진행 중이다. 경북 포항 영일만 일대에 대규모 휴양시설을 조성한다. 오는 2018년까지 총 5416억 원을 투입해 이 일대에 호텔, 콘도, 캠핑장, 연수원, 골프장 등을 건립한다. 휴양단지가 들어설 곳은 덕성학원 소유의 항시 남구 동해면·호미곶 일원 299만 7000㎡(약 90.6만 평) 규모의 부지다. 포항시가 이번 개발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벌인 결과 휴양단지가 들어설 경우 1조 3000억 원의 생산유발 효과를 거둘 것으로 평가 됐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