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 장밋빛 전망에 홀려 실기한 지자체도
저패니메이션 중에서 1990년대 후반에 데뷔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다 보면 생체 메카닉을 운용하는 데 있어 ‘5분’이란 제한 시간을 두는 참신한 사고를 저질렀다. 이전의 그랜다이저, 그레이트 마징가도 이런 적이 없었고 로보트 태권브이도 마찬가지였다. 에반게리온의 5분이란 제한 시간은 애니메이션의 긴박감을 높이는 동시에 2차전지 산업 강국이며 배터리 제품과 모바일 IT 천국인 일본에서나 나올 법한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나는 종종 “모든 기술과 공학의 병목은 2차전지”란 말을 한다. 반도체 기술 직접도가 18개월마다 2배씩 올라가는 동안 리튬이온 2차전지의 에너지 밀도는 12개월마다 기껏 5%가량 올라간다. 그나마 꾸준히 올라가면 다행. 이젠 이론적으로도 점점 포화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짜내고 짜내 복합화한 전극 활물질을 계속 시도하면 에너지 밀도가 조금 느는 반면 사이클 수명이나 안전성 등 다른 성능이 뚝 떨어져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그래서 리튬이온 2차전지 쪽에선 “몇 배의 에너지 밀도가…” 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보도는 십중팔구 오류이거나 사기라 봐도 될 정도이다. 에너지 밀도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소위 미래학 운운하는 사기꾼들이 자주 하는 말이 “에너지 혁명이 있을 것이고 배터리가 혁신적으로 발전하여 배터리 전기차가 대세가 될 거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술들은 ‘성립하지 않는 전제’하에 던진 가정법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허황된 장밋빛 전망에 홀려 실기한 지자체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리튬이온 2차전지(리튬이온폴리머 2차전지를 포함하여)의 의미 있는 진화는 간간이 있었지만 혁신이나 혁명은 없었다. 혁신과 혁명이 가장 어려운 분야가 에너지 쪽이며 그중 가장 힘든 게 2차전지 쪽이라 봐야 한다. 리튬이온 2차전지 기술은 달팽이가 기어가듯 천천히 진화할 뿐이다.
# 살리에르 꼴이 된 Ni-MH 2차전지
이 같은 2차전지 ‘달팽이사’에서 1992년과 1993년은 100년에 한 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이 연이어 일어난 해였다. 1992년엔 Ni-MH(니켈수소) 2차전지가 시장에 나왔고, 1993년엔 리튬이온 2차전지가 나왔다. 전기에너지 상업화와 궤를 같이한 게 2차전지이다 보니 한 세기 동안 상업화에 성공한 2차전지는 손꼽을 정도였다. 이 2차전지들 중 끝판왕으로 인정받는 게 바로 리튬이온 2차전지다.
한 해 먼저 나온 Ni-MH 2차전지를 살리에르 꼴로 만들어버린 모차르트 같은 리튬이온 2차전지는 처음엔 소형 2차전지 쪽을 석권하더니, 곧이어 풀하이브리드에 먼저 피신한 Ni-MH 2차전지를 다시금 ‘찜쪄먹으면서’ 풀하이브리드와 배터리 전기차 분야로도 진입하며 세계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리튬이온 2차전지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최초로 리튬이온 2차전지를 개발, 상용화를 시도한 이유 중 인상 깊은 점은 두 가지였다. 기존 2차전지와 달리 유기계 2차전지로 개발되어 3V 이상 고전압 단전지를 구현할 수 있어 2차전지 중 최고의 에너지밀도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였고, 지구상에 리튬이 풍부한 게 또 다른 이유였다.
한데 리튬이온 2차전지가 출시된 지 23년쯤 지난 지금, 이해가 아니라 외려 오해가 깊어지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희토류 광물인 리튬의 광산을 빨리 선점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주장이다. 대체 어떤 인사가 이런 악성 루머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촌극으로 인해 볼리비아 리튬 광산 채굴권이 자원외교의 핵심으로 등극했고, 모 정부출연연구소에서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리튬 고속추출 기술에 10억대의 인센티브가 부여되기에 이르렀다.
증권가 리포트나 언론 보도에도 ‘2020년이면 리튬 고갈’이란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2016년 6월에는 배터리 전기차와 그리드 에너지 저장 장치용 리튬이온 2차전지 수요 증가에 힘입어 탄산리튬 선물단가가 3배가량 급증했다고 국내외 언론과 호사가들이 ‘리튬 러시’를 외치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그럴 줄 알았다).’
리튬이온 2차전지가 중요해지면서 관심이 급증해 이런 촌극이 빈번해지는 것인데, 반가우면서도 씁쓸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에게 리튬 관련 사업을 어필하기 위해 리튬 고갈을 주장하며 ‘희귀한 금속’이란 의미로 희토류라고 거짓말을 한 사업자들이 잘못 꿴 첫 단추이자 촌극의 시작이었다.
LG화학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적용한 현대차 아이오닉. 출처=LG그룹 블로그
# 리튬은 ‘희귀한 금속’이 아니다
리튬은 희토류가 아니다. 자연계에 풍부한 알칼리 금속이다. 지표면, 해수, 염수에 매우 풍족하다. 다만 지표면에서 채굴할 수 있는 경제적인 리튬이 점점 줄어든다는 말을 과장하여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한술 더 떠 ‘2020년 리튬 고갈’도 미국지질조사소(USGS) 보고서의 오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네바다 주의 테슬라모터스 기가팩토리가 2020년까지 50만 대/년의 리튬이온 2차전지를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이 와전된 것이다.
이와 흡사한 오독은 이미 10여 년 전 Ni-MH 2차전지에도 있었다. 당시에 니켈 선물단가가 급속히 올라가 Ni-MH 2차전지가 리튬이온 2차전지를 넘어설 거라고 주장한 컨설턴트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2005년 5월, 6월을 거치면서 외려 니켈 선물단가가 급락했다.
일시적으로 경제적인 리튬 확보에 경색이 일어날 수는 있으나 자원 부존량이 풍족한 편이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세르비아, 중국 등에서 지표면 및 염수 호수 리튬 추가 생산이 계획되고 있을뿐더러 리사이클링 이야기도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게다가 리튬이온 2차전지 원가 구조 측면에서도 타격이 크지 않은 편이다. 이게 본래 리튬이온 2차전지를 개발하게 된 최고의 장점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리튬 고갈설은 ‘설레발’이 심하다 할 수 있다. 리튬 러시는 결국 누군가의 작은 희망일 뿐이다.
박철완 전기화학자
전기화학자 박철완은 차세대전지 성장동력사업단을 책임 운영하였고, 산업부 지정 차세대전지이노베이션센터 센터장을 지냈다. 책 <그린카 콘서트>를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