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각이 무산된 제일기획은 그룹 차원의 전략적 지원 없이 독자 생존을 위한 새로운 비전 수립에 나섰다. 한남동 제일기획 사옥 전경. 사진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금융감독원(금감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제일기획의 최대주주는 삼성물산(지분율 12.64%)이다. 2대 주주인 삼성전자(12.6%)와 삼성카드(3.04%), 삼성생명(0.27%) 등을 더한 삼성 계열사의 총 지분율은 28.55%다. 또 제일기획은 1376만 2500주(11.96%)에 달하는 자기주식을 갖고 있다.
매각 협상을 진행한 퍼블리시스는 이들 주식의 평가액을 놓고 삼성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7000억 원+α를 제시한 반면 퍼블리시스는 이에 못 미치는 매각가를 제시했다는 게 중론이다.
또 협상 도중 퍼블리시스가 제일기획을 인수 후 다른 다국적 광고회사에 매각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코카콜라, P&G 등 대형 광고주를 잃고 주가 또한 하락해왔다는 점이 이 같은 소문을 부추겼다. 제일기획 내부에선 ‘퍼블리시스가 제일기획 영업망을 다른 회사에 넘기기 위해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인수 제안 초기부터 ‘광고물량’에만 관심을 보였다는 주장이다.
실제 퍼블리시스는 삼성전자 등 그룹 계열사의 광고물량 보전을 협상 조건에 포함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감원 공시에 따르면 제일기획의 지난해 영업매출은 2조 8000억 원으로 이 가운데 삼성 계열사 매출 비중은 약 65%에 달했다. 2014년 약 76%에 비하면 그룹 의존도를 그나마 줄인 것이다. 협상 과정을 지켜본 재계 관계자는 “(그밖에) 많은 설이 오갔지만 말 그대로 ‘설’에 그쳤다”며 “(제일기획 쪽에서) 협상 파트너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제일기획 내부에선 매각이 무산된 데 대해 안도하는 목소리가 감지된다.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은 추가적인 매각 가능성을 일축하며 공격적인 투자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으로 돌아온 제일기획 앞에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우선 제일기획의 ‘광고 능력’에 대해 시장은 ‘퍼블리시스의 인수 포기가 이를 대변한다‘는 평가를 내렸다. 삼성 측의 매각 의지가 높은 상황에서 제일기획의 경쟁력을 높이 샀다면 퍼블리시스가 굳이 낮은 매각가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의미다. 제일기획은 국내 1위 광고업체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셈이다. 한 외국계 광고업체 관계자는 “광고 능력이라는 게 데이터로 측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제일기획의 경우) 삼성의 후광을 무시하긴 어렵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제일기획의 국내 순영업수익은 8376억 원이다. 이 중 삼성전자가 올려준 수익만 4724억 원이다. 2조 원에 이르는 해외 순영업수익 대부분도 삼성에서 파생된 것이다. 제일기획은 삼성전자가 진출한 해외 거점마다 법인을 세우고 광고물량을 수주하고 있다.
높은 계열 의존도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여론의 비난을 고려할 때 삼성 경영진에 부담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2013~2015년 당기순이익이 2860억 원에 달할 만큼 상당한 현금 창출력에도 불구하고 제일기획이 매물로 나온 이유로 꼽힌다.
매각이 공식화된 지난 2월 2만 1000원대에서 1만 5000원대까지 떨어진 주가는 이달 들어 1만 7000원대까지 반등했다. 매각 관련 불확실성이 사라진 데 따른 시장의 반응이다. 하지만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한다면 주가 회복세는 멈출 수 있다. 인쇄매체 등 기존 광고시장은 얼어붙고 있으며, 방송 광고시장은 업체 간 출혈경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제일기획은 상대적으로 고성장세에 접어든 모바일 광고 시장을 개척하고, 가상현실(VR) 마케팅 등 신사업 전략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리테일(소매·유통) 부문에 대한 포괄적인 마케팅 솔루션 제공은 제일기획의 미래 먹을거리 중 하나다. 제일기획 측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 해외 광고 에이전시를 추가 M&A(인수· 합병)해 시너지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향후 제일기획이 그룹 차원의 전략적 지원을 받을 것이란 전망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지난해까지 제일기획의 경영전략을 총괄한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은 임원 자리에서 물러나 올해부터 패션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로서 제일기획이 매각될 가능성은 0%”라면서도 “하지만 삼성이 정책적 차원에서 임의로 제일기획의 일감을 늘리거나 보전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21일 삼성은 “제일기획의 역량 강화를 위한 외부 경영 컨설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삼성 측은 “제일기획이 ‘독자 생존’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수립해야 한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매각 직전까지 갔다가 ’독자생존‘의 길을 걸어야 하는 제일기획이 어떤 해법을 찾아낼지 관심이 집중된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