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말 국세청 홈페이지에는 재벌그룹이 운영 중인 공익법인의 기부금과 사업비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시가 일제히 게시됐다. 이들 중 단연 눈길을 끈 곳은 형제 간의 내분과 검찰 수사 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롯데그룹이 운영하는 ‘롯데장학재단’이다.
신영자 이사장이 맡고 있는 롯데장학재단은 계열사 간 거래로 생긴 시세차익을 이용해 계열사 주식을 사들여 오너 일가의 그룹 지배력 강화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실제로 롯데장학재단은 대홍기획 21.0%, 롯데제과 8.69%, 롯데칠성음료 6.17% 등 9개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롯데장학재단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녀이자 비자금 조성 의혹의 시발점이 된 신영자 이사장이 맡고 있는 공익법인이다.
오너 일가가 이사장을 맡고, 재단은 계열사 주식을 사들이는 재벌그룹은 롯데뿐 아니다. 삼성그룹의 경우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삼성생명공익재단을 통해 3000억 원대의 계열사 지분을 사들인 사실이 밝혀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지난 2월 삼성SDI가 보유 중이던 삼성물산 지분 200만 주(1%)를 3000억 원에 사들였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지분 매입 이유에 대해 ‘보유 현금에 대한 장기적 투자수익 확보 차원’이라고 밝혔다.
공익재단이 기부금을 운용하기 위해 상장기업 주식을 사들여 시세차익을 얻는 것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천수답이나 다름없는 기부금에만 의존하면 공익사업에 필요한 재원이 불안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사들인 삼성물산 지분이 하필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지난해 12월 순환출자구조 강화를 이유로 매각을 명령한 500만 주(2.6%) 중 일부라는 점. 공정위는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한 뒤 공정거래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신규 순환출자 고리가 발생한 것을 발견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을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특히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는 회사이니만큼 “공익재단을 그룹 지배권 강화에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공익재단 외에도 삼성꿈장학재단,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등 4개의 공익재단이 삼성생명 등 8개 계열사의 5조 원이 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재벌들이 이처럼 공익재단을 통해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이유는 세금혜택 때문이다. 공익재단은 5% 미만의 계열사 지분에 대해서는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성실공익법인으로 지정되면 상속·증여세 면제 범위가 10%까지 늘어난다.
성실공익법인이란 △운용 소득의 80% 이상을 직접 공익목적 사업에 사용한 법인 △출연자 또는 그의 특수관계인이 공익법인 등의 이사 수의 5분의 1을 초과하지 않은 법인 △외부감사를 이행한 법인 △전용계좌를 개설해 사용하는 법인 △결산서류 등의 공시를 이행한 법인, 이 5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경우를 말한다.
얼핏 까다로워 보이지만 사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운용 소득의 80%를 사용하는 것은 장학사업 등을 활발히 하면 쉽게 맞출 수 있고, 이사 수도 오너 일가가 이사장을 맡으면 굳이 여러 명이 개입할 이유가 없으며 결산서류 공시나 외부감사는 재벌계열 재단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한 가지 조건인 전용계좌 개설 역시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성실공익법인으로 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계에서는 성실공익법인으로 지정돼 계열사 지분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공익재단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은 정몽구재단을 통해 핵심 계열사 주식을 갖고 있다. 정몽구재단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남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직결된 회사들인 이노션 지분 9%와 현대글로비스 지분 4.46%를 보유 중이다.
정몽구재단이 갖고 있는 주식들은 특히 2006년 현대글로비스 비자금 사태 이후 정몽구 회장이 약속한 사재출연분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 회장은 당시 1조 원의 사재출연을 약속했고, 실제로 2013년 말까지 8500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내놨다. 그리고 100% 정몽구재단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 입장에서는 사재출연 약속을 지키면서도 계열사 지배력을 강화하고, 성실공익법인 지정을 통해 면세혜택까지 받는 1석3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롯데나 삼성, 현대차 외에도 대부분 재벌그룹은 비슷한 방식으로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다. SK그룹의 한국고등교육재단, LG그룹의 엘지연암학원·엘지연암문화재단,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금호아시아나재단·죽호학원 등도 수백억 원어치 이상의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금호아시나그룹의 공익재단들은 시민단체들로부터 “박삼구 회장의 금호아시아나그룹 되찾기에 동원됐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박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지주사인 금호산업을 되찾기 위해 ‘금호기업’이라는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했는데, 금호아시아나재단과 죽호학원 등이 이 회사 지분 매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경제개혁연대는 “재벌이 공익법인을 이용해 지배권을 유지·강화한 대표적 사례”라며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금융권에서는 전통의 증권 명가 대신증권이 설립한 공익법인이 배당받은 돈으로 대신증권 주식매집에 열을 올리고 있어 눈총을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대신증권의 공익법인인 대신송촌문화재단은 최근 대신증권 주식을 꾸준히 사들여 지분율이 1분기 말 기준 4.9%(우선주 포함)로 높아졌다. 최대주주인 양홍석 사장의 6.92%에 이어 2대 주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 사장의 모친인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1.615)보다 지분율이 훨씬 높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목은 송촌문화재단의 수입 가운데 대부분은 대신증권에서 받는 배당금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회사 돈으로 오너 3세인 양홍석 사장의 우호지분을 계속 사들이면서 세제혜택도 받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대신증권의 경우 공익재단을 내세워 왼쪽 주머니에 있는 돈을 오른쪽 주머니로 옮긴 뒤 경영권 확보에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선대 회장들이 애써 만든 증권명가다운 전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아쉽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