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의 유동성 문제로 현대상선으로의 흡수합병이 진행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진해운 본사 전경. 일요신문DB
두 해운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합병 논의는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지난해 5대 취약 업종(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 구조조정을 앞두고 정부, 금융당국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이른바 ‘서별관회의’에서 처음 합병론을 제기했다.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 관계부처 수장들이 모인 자리였다. 이 회의에서 두 해운사를 모두 살리기 어렵다면 하나의 선사로 합치는 방안도 검토됐다고 한다.
이후 합병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가 지난 13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한진해운의 정상화 추진 상황을 봐가며 합병이나 경쟁체제 유지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하면서 다시 떠올랐다.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서 금융당국 핵심 인사가 합병 가능성을 언급하자 업계가 술렁였다. 이에 17일 김영석 해수부 장관이 합병설 진화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당국의 입장은 두 해운사의 출자전환이 완료돼 두 회사 모두 산업은행 자회사로 편입되면 그때 가서 합병을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정부가 주도하는 해운 구조조정의 마지막 단추가 양사의 합병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합병을 통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선사를 출범시켜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선례를 남기고 싶어 한다는 것.
출자전환이 사실상 확정된 현대상선의 지난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업은행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산업은행이 해운 구조조정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자율협약을 신청한 초기에는 대주주(오너) 사재출연 등 고강도 선제조건을 내걸며 회사를 크게 압박했다. 반면 현대상선이 용선료 협상 등에서 난항을 겪자 산업은행 부행장까지 나서서 협상 타결을 이끌어냈다.
또 다른 분석은 현대상선에 비해 한진해운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서 합병설이 급물살을 탔다는 것이다. 한진해운은 지난 분기에도 흑자를 기록하며 현대상선보다 나은 경영지표를 보였다. 하지만 향후 유동성 확보에 문제점을 드러내며 불안감을 키웠다. 당장 1조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한진그룹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4000억 원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진해운이 산업은행에 6000억 원 규모의 단기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한진해운이 우여곡절 끝에 조건을 충족해 출자전환을 받는다 해도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풍부한 유동성을 확보한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병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 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이 합병하면 중복되는 부문의 인력감축이나 재배치 등으로 경영 효율성을 제고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상선은 한진해운이 가입한 ‘디 얼라이언스’가 아닌 ‘2M’과 해운동맹 가입 논의를 시작했다. 서울 연지동에 위치한 현대상선 본사 전경. 일요신문DB
한편 용선료 협상을 마무리한 현대상선은 해운동맹 재가입이란 과제만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디 얼라이언스’에 소속된 한진해운이 현대상선의 참여를 꺼린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를 두고 한진해운이 현대상선을 견제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내 업계 1위인 한진해운이 2위 현대상선에 흡수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는 것. 그러나 한진해운 관계자는 “왜 그런 추측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이미 여러 번 밝혔듯이 현대상선의 디 얼라이언스 합류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은 합병에 관한 이슈는 전적으로 당국과 산업은행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7월 중순 출자전환이 완료돼 오는 8월 5일 재상장을 앞둔 현대상선은 이미 산업은행 자회사나 다름없다”며 “합병 등 회사 경영과 관련된 일은 산업은행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산업은행도 합병 논의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한진해운의 경우 이제 막 용선료 협상에 돌입했다”며 “현재는 두 회사의 경영 정상화에 힘을 모을 때지 합병 논의가 나올 시점이 전혀 아니다”고 일축했다.
그런데 지난 23일 현대상선은 디 얼라이언스가 아닌 ‘2M’과 얼라이언스 가입 논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2M은 세계 1, 2위 선사인 덴마크의 머스크사와 스위스의 MSC사가 결성한 최대 규모의 동맹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2M이 가장 큰 동맹이긴 하지만 아시아지역에 거점이 없는 점과 미주노선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에서 현대상선과 동맹 가입 논의를 하게 됐다”며 “긍정적인 결과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이 2M에 가입한다면 한진해운과는 서로 다른 해운동맹에 속하게 된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두 회사의 합병을 전제로 놓고 고려해 본다면, 서로 다른 동맹에 속하게 되면 합병의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재훈 기자 julia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