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3일(한국시간) 볼티모어 오리올스 앳 캠든야즈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현수는 메이저리그 데뷔 후 보낸 곡절 많은 시간들을 돌아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수는 시범경기에서 타율 .178의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당시 기록한 안타도 빗맞은 안타가 대부분이라 타구질이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야 한다는 여론의 포화를 맞고 김현수의 내적 갈등은 꽤 크고 깊었다. 그런 그가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다. 6월 24일 현재 김현수는 35게임에 출전해 안타 38개, 홈런 1개, 볼넷 12개, 삼진 16개로 타율은 .339를 기록 중이다. 시즌 개막 후 가뭄의 콩 나듯이 주어진 9번이란 타순도 지금은 주전급 2번 타자로 변화를 맞이했다. 볼티모어에서 직접 만난 김현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다.
김현수는 모든 선수들이 클럽하우스를 빠져나갈 때까지 라커에 나타나지 않았다. 선발 투수로 활약한 우발도 히메네즈도, 이날 경기에서 1회 첫 홈런을 터트린 마크 트럼보도 가방을 메고 클럽하우스를 떠났지만 ‘이웃 주민’ 김현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사하러 갔나?’하며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김현수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들어섰다.
동료와 감독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김현수. 당분간 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2일 경기에서 김현수는 좌측 담장으로 넘어오는 공을 잡으려다 펜스와 충돌하는 바람에 무릎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오늘 경기 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치료받는 데 소요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7-2 승리를 거둔 후 씻지도 않고 곧장 물리치료실을 찾았던 김현수. 기자 앞에 나타난 그의 오른 무릎에 치료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공식 인터뷰에선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조금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핑계 대는 걸 싫어하는 성격 탓이다.
23일 김현수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2차전에서 2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처음 두 타석은 땅볼과 뜬공으로 물러났고 5회말 무사 1루서 맞이한 세 번째 타석에선 우전안타를, 6회말 2사 2루 네 번째 타석에선 좌전안타를 성공시켰다. 모두 상대의 시프트를 뚫고 나온 소중한 안타였다. 주자가 홈을 밟는 사이 김현수는 2루까지 진루했다. 멀티히트는 물론 2경기 연속 타점을 올리며 시즌 6타점 성공.
경기 후 다시 만난 김현수는 전날 샌디에이고에 역전패했을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한결 좋아 보인다는 얘기에 “다른 팀은 몰라도 우리 팀은 승패에 따라 선수들 분위기에 큰 차이가 없다”면서 “그게 볼티모어의 매력인 거 같다”고 설명했다.
김현수는 전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심판의 볼 판정에 신경 쓰느라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래서 오늘 경기에선 심판의 볼 판정보다는 자신의 눈을 믿고 보다 활발히 공격에 나선 부분을 거론했다.
김현수는 최근 아담 존스와 테이블 세터를 이루고 있다. 김현수는 아담 존스와의 호흡에 대해 상당히 만족해했다(아담 존스는 볼티모어에서 지금까지 8년 연속 100안타와 2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했으며 2013년엔 아메리칸리그 실버슬러거를 수상했고, 4번의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아담 존스는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다.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패하는 상황에서도 ‘내일 잘하면 된다’는 말로 선수들 사기를 북돋운다. 무엇보다 그런 대단한 선수가 앞에서 쳐준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다.”
시즌 초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김현수는 그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김현수는 그동안 심판의 볼 판정에 애를 먹은 적이 많았다. 빠진 공이라고 생각하면 스트라이크를 불어대는 바람에 적극적인 공략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윙을 하더라도 좀 더 좋은 포인트에서 칠 수 있게끔 말이다. 물론 공격적으로 야구하다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겠지만 내 야구를 하고 싶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메이저리그였고, 그 동경이 현실로 펼쳐졌지만 김현수는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현실은 그가 마음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도 야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적응만큼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곳 세계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걸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내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타격 코치와 연습에 몰두하면서부턴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김현수가 안타를 치고 살아나는 조짐이 보이자 이번에는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 좌타자인 김현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 팀은 내야수를 1-2루 간에 모으는 시프트를 건다. 그러나 김현수는 처음 몇 경기에서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 이후에는 오히려 시프트를 뚫고 안타를 만들어내는 실력을 뽐냈다. 오히려 시프트에 강한 면모를 보인 것이다.
“시프트도 야구의 일부분 아닌가. 한국에선 시프트를 대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시프트는 처음 경험한다. 이런 시프트에 자극을 받기보단 타석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김현수는 야구하면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다는 내용이다.
김현수는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왼쪽은 벅 쇼월터 감독.
“한국에서도, 또 여기서도 항상 열심히 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야구 안 될 때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매일 일찍 야구장에 나오려고 하는 편이다.”
KBO리그 두산 베어스의 김현수는 붙박이 주전 선수였다. ‘타격기계’의 아우라에 상대팀 투수들이 쩔쩔 매기 일쑤였다. 메이저리그 입성 후에는 주전보다는 벤치에서 야구 보는 횟수가 많았다. 그 낯선 경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힘들게 생각하면 한없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편하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벤치에서 바라보는 야구도 야구다. 경기에 집중하면서 내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 되돌아봤다. 미국에 오면서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예상했었다. 나만이 아닌 다른 선수들도 경험하는 부분이다. 그걸 얼마나 빨리 이겨내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쉽지 않더라.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김현수는 메이저리그 무대가 자신의 야구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좌절을 겪고,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내가 좀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안타, 홈런을 쳤다고 해서 더 기분 좋아하기보다는 항상 침착하자, 조심하자는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시즌 초반에는 야구 못한다고 욕도 무지 많이 먹었다. 지금은 종종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나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 모두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그들 모두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나 또한 그 응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미국 볼티모어=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아담 존스·마크 트럼보, 김현수 성실함에 엄지 척! 볼티모어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면 입구 가까이에 앉아 있는 아담 존스가 한국 기자들에게 자주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면서. 김현수나 통역한테서 배운 인사냐고 묻자 그는 “아니다. 난 이전부터 ‘안녕’이란 한국 인사말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아담 존스는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 후 추신수, 백차승과 마이너리그 생활을 함께했다. 그때 두 명의 한국 선수들로부터 한국어는 물론 한국 음식까지 공유했다고 말한다. “2006년 타코마(시애틀 마이너리그 팀)에 추신수, 백차승과 룸메이트였다. 그들은 항상 김치 요리를 했다. 매운 음식을 먹고 정신없어 하는 날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 때문인지 아담 존스는 김현수를 살뜰히 챙겼다. 김현수가 개막전에서 볼티모어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 김현수를 보호하기도 했었다. “김현수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팬들의 어떤 비난에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갔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하다. 관중들이 야유하고 욕을 퍼부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웃음). 가끔은 나도 영어를 못 알아듣고 싶을 때가 있다. 관중들의 욕을 안 듣고 싶어서.” 아담 존스는 김현수의 첫 인상에 대해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면서 “김현수에 대해 관심이 생겨 KBO리그의 성적을 살펴봤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기록을 갖고 있었다”는 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담 존스는 김현수의 변함없는 성실함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왼쪽부터 김현수, 아담 존스, 마크 트럼보. 셋은 절친이다. 볼티모어의 4번 타자 마크 트럼보. LA 에인절스를 시작으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애틀 매리너스를 거쳐 올 시즌 볼티모어에 영입된 선수다. 처음 볼티모어에 입단할 때만 해도 팬들은 이 선수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파워는 있지만 워낙 높은 삼진율로 인해 ‘모 아닌 도’란 평가도 있었다. 그런 그가 볼티모어 유니폼을 입은 후 훨훨 날고 있다. 현재 홈런 21개를 기록하며 팀 1위에 올랐다. 마크 트럼보는 김현수를 스프링캠프 시작하기 전에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캠프 시작 전에 미리 플로리다의 사라소타 캠프에 들어가 훈련을 했는데 그때 김현수를 처음 봤다. 김현수의 훈련 태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평소 생활뿐만 아니라 야구를 대하는 태도가 내 눈에 들어왔다.” 마크 트럼보는 김현수의 부활을 확신했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가 안타를 못 치고, 풀이 죽어 있는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그는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 ‘기회만 와라, 내가 보여줄게’ 하는 심정으로. 그 부분이 지금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우리 팀에서 가장 성실한 친구다.” 볼티모어의 내야수 조나단 스쿱은 김현수가 자신의 한국어 선생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많은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있지만 자신이 머리가 나빠 자꾸 까먹는다며 웃음을 터트린다. 이외에도 김현수는 볼티모어 선수들과 두루 잘 지내고 있었다. 최근에는 벅 쇼월터 감독과 더그아웃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장난치는 모습도 목격이 됐다. 팀 성적은 물론 돋보이는 개인 성적으로 동료들과 감독한테 인정을 받으니 김현수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당분간 김현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