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 미국 시애틀의 세이프코필드에서 사연 많은 서른네 살 동갑내기가 반갑게 해후했다. 오승환(왼쪽)은 트레버 로젠탈을 대신해 마무리 후보로, 이대호는 아담 린드와의 플래툰 시스템에서 벗어나 매 경기 주전으로 선발 출전하고 있다.
“제가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 맺을 때 어떤 목표를 세운지 아세요? 딱 세 가지였어요. 첫 번째가 25인 로스터에 진입하는 것, 두 번째가 등번호로 10번을 달고 뛰는 것, 마지막 세 번째가 주전 선수로 매 경기 출전하기였습니다. 이 세 가지 목표 달성 시기를 6월 말 정도로 봤는데 목표대로 진행됐다는 게 신기하네요.”
이대호의 설명이었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될 때만 해도 25인 로스터는 고사하고 40인 로스터에도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았던 이대호가 어느새 시애틀 주전 1루수로 떠오르고 있다. 시애틀 매리너스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이대호는 아오키 노리치카의 마이너리그 강등으로 주전으로 뛰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원래 주전’이었던 아담 린드를 제치고 오른손, 왼손 투수 상관없이 매 경기 출전 중이다. 25인 로스터 진입도 불투명했던 이대호의 ‘지금’은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 그런데 이대호는 시애틀과 계약을 맺으며 자신만의 야구 플랜을 미리 짜놨었고, 계획대로 완성시켜 나갔다.
“선수들 체력이 떨어지고 부상 등이 나타나는 6월 중순 이후부터 팀 내 변화의 조짐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팀이 초반엔 잘나갔잖아요. 그럴 땐 변화를 줄 수 없어요. 그러다 팀이 한두 차례 위기를 겪으면 선수 구성에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요. 시즌 중에 마이너리그로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제게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대호는 스프링캠프 때부터 유난히 수비 연습에 집중했다. 10kg 이상의 체중 감량은 물론 매일 다른 선수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매니 악타 코치와 함께 수비 연습에 임했다. 그는 스프링캠프를 떠올리며 “당시 목숨 걸고 공을 잡으러 뛰어 다녔다”고 말한다. 그가 수비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생존 때문이었다. 수비에 문제가 있다는 스카우팅 리포트를 뒤엎고자 이대호는 서른네 살의 나이에 진짜 루키처럼 메이저리그 훈련장을 뛰고 굴렀다. 이대호가 수비 연습에 치중한 부분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지금은 아담 린드를 대신해 이대호가 주전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이대호의 여유 있는 한마디.
“원래는 내가 지명타자로 가고, 아담 린드가 1루를 맡아야 하는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보여준 것 같아요(웃음).”
이대호는 클럽하우스에서 선수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한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 전혀 없다. 짧은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선수들이 이대호가 전하는 뜻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그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동료가 로빈슨 카노다. 이대호는 카노와 단어로 대화를 나누고 카노는 그런 이대호를 살갑게 챙긴다.
한번은 이대호의 라커룸에 ‘CANO’라고 이름이 적힌 스파이크가 눈에 띄었다. 기자가 “왜 카노 신발을 신는 거냐”고 묻자 이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원래 신던 스파이크가 맞지 않다고 하니까 카노가 자기 신발을 여러 켤레 선물로 건넸다”고 설명한다. 카노는 원정, 홈에서 신는 스파이크를 제대로 구분해서 이대호에게 안겨줬다. 이대호는 카노의 스파이크를 신고 시합에 나간다.
이대호는 스프링캠프 때부터 수비에 문제가 있다는 스카우팅 리포트를 뒤엎고자 루키처럼 훈련장에서 뛰고 굴렀다. 지금은 주전 1루수로 나서며 자신만의 야구플랜을 하나하나 이뤄가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대호의 위치는 ‘백업 멤버’였다. 그러나 지금 그를 가리켜 후보 선수라고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대호가 시즌 초 레그킥을 선보였을 때 메이저리그 현지 기자들은 레그킥으로 인해 타격 타이밍이 늦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이대호의 타격폼에 대해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레그킥으로 타격해도 홈런 치고 안타 치고 타점 올리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6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는 커다란 변화가 감지됐다. 마이크 매서니 감독이 줄곧 신뢰를 보였던 마무리 투수 트레버 로젠탈의 자리에 변화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가장 유력한 마무리 후보는 오승환이었다. 그러나 매서니 감독은 세인트루이스의 불펜 중 시그리스트, 브록스턴, 오승환을 돌아가면서 마무리로 기용하겠다고 밝혔다.
스프링캠프 초반에만 해도 세인트루이스의 마무리를 맡고 있는 로젠탈을 오승환이 뛰어 넘어서기란 매우 어렵다고 본 게 사실이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클로저로 꼽히는 로젠탈의 기록과 아우라는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즌이 진행될수록 로젠탈은 흔들렸고, 오승환은 점점 진화했다. 결국 매서니 감독은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원정 경기 중 결단을 내린 것이다. 3인의 마무리 체제로. 그 3인 중에서 오승환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팀 변화에 대해 오승환은 자세를 낮췄다. 잠시 흔들리는 로젠탈을 대신해 자신이 임시로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됐다고 설명했다.
“로젠탈의 컨디션이 돌아오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게 되면 우리 또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아요. 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팀 결정에 따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 로젠탈이 돌아올 때까지 공백을 느낄 수 없게끔 잘 메워갈 수 있도록 노력은 할 거예요.”
세인트루이스 취재 당시 만났던 팀 전담 기자들은 오승환이야말로 로젠탈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MLB.com의 매튜 골든 기자는 “세이브라는 타이틀이 홀드보다 더 무게가 있기 때문에 어느 팀이나 세이브 상황에서 어떤 투수를 내보내느냐 하는 문제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평소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매서니 감독이 로젠탈 카드를 내려놨다는 것만 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제프 고든 기자는 “오승환은 매서니 감독에게 큰 매력을 선사했다. 메이저리그 ‘루키’에게 마무리를 맡겼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렇다면 오승환은 어떻게 해서 이토록 짧은 시간에 매서니 감독과 현지 기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됐을까.
7월 1일 현재 오승환은 모두 39경기에 나와 40이닝을 던져 2승 53탈삼진 11볼넷 평균자책점 1.58을 기록 중이다. ‘돌직구’란 별명에 맞게 여전히 그의 주종은 패스트볼이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진출 후 상대 타자들의 빠른 배트 스피드와 콘택트 능력을 제압하기 위해 슬라이더와 커브를 자주 섞어 던지며 패스트볼의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오승환은 잠시 흔들리는 로젠탈(오른쪽)을 대신해 임시로 마무리 역할을 맡았다고 자세를 낮췄지만 현지 기자들은 오승환이야말로 로젠탈의 훌륭한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대호도 오승환의 진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에 있을 때 승환이의 그 빠른 볼을 좋아했어요. 워낙 힘이 있는 볼이라 맞히기만 하면 멀리 날아갔었죠. 그런데 일본 진출 이후부터 ‘이상한’ 볼을 던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보지도 못한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섞어 던지는 탓에 이전처럼 빠른 볼만 기다릴 수도 없게 됐습니다. 타자들 입장에선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어요. 메이저리그에선 가급적 승환이와 맞붙고 싶지 않아요.”
최근 오승환을 직접 상대해봤던 추신수는 “와인드업을 한 뒤 한 차례 멈추고 공을 뿌리는 특이한 투구폼이 타자들한테는 타이밍 잡는 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면서 “불펜이다보니 타자들은 제한적으로 승환이를 상대한다.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 당분간은 다른 선수들도 승환이의 공을 공략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번엔 오승환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 팀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매서니 감독과 저예요. 시즌 중에도 웨이트트레이닝을 집중해서 하는 편입니다. 지난 연말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며 웨이트트레이닝에 빠져 지냈던 게 지금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게 구종이 추가됐느니, 제구가 더 좋아졌다는 등의 평가를 하지만 전 똑같아요. 좀 더 깊어지고, 좀 더 생각해서 던지는 것 외엔 비슷한 편입니다.”
오승환도 불펜 투수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얼마 전 모처럼 맞이한 휴식일에 투수들과 함께 서바이벌 게임을 하러 놀러갔던 일화를 소개했다.
“평소의 전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입니다. 휴식일에는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 편이죠. 그런데 선수들이 서바이벌 게임을 하러 가자고 초대를 하는 거예요. 잠시 고민했다가 오케이하고 다음날 선수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수들이 제게 손을 내밀 때 기분 좋게 잡았어요.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
오승환은 외국인 선수로 살다 보면 야구보다 야구 외적인 문제로 갈등을 느끼고 고민하는 일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도 이대호도 일본에서 먼저 외국인 선수로 생활했던 경험이 메이저리그에서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풀어냈다.
이대호와 오승환은 KBO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와 투수였다. 일본에서의 활약도 눈부셨다. 타점왕, 일본시리즈 MVP(이대호), 한신의 외국인 개인 통산 최다 세이브(오승환)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그런 두 선수가 미국에서 재회했다. 각자의 생존 방식을 들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과정은 드라마 같은 스토리로 탄생했다. 우리는 흥미진진하게 그 ‘드라마’를 시청 중이다.
미국 시애틀=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이대호는 최근 시애틀에 원정경기차 방문하는 한국 선수들과 만나 외국생활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있다. 지난 1일 경기 전 김현수와 외야에서 대화를 하며 몸을 푸는 모습. “트럼보가 ‘맹구 친구냐’ 묻던데요ㅋㅋ” 오·강·김 접대로 바빴던 이대호 6월 25일(한국시간)부터 7월 4일까지 시애틀 매리너스의 이대호는 호스트였다. 한국 선수들이 소속돼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그리고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잇달아 시애틀로 원정 경기차 방문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마치 미리 예상하고 시즌 스케줄을 잡은 것처럼 이대호는 오승환, 강정호, 김현수와 반갑게 해후하며 외국 생활의 희로애락을 공유했다. 호스트 입장이었던 이대호는 이들의 방문을 앞두고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식당이었다. 밤 10시면 문을 닫는 시애틀 현지 상황에서 저녁 경기 후 친구 또는 후배들과 함께 식사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 그는 사전 탐문과 시식 끝에 자신이 거주하는 시애틀 밸뷰 쪽의 한식당을 찾아냈다. 그곳을 찜한 가장 큰 이유는 고기의 퀄리티 때문이라고 한다. “고기가 정말 맛있더라고요. 사장님도 매우 친절하셨고. 무엇보다 제가 가면 밤 10시 이후에도 장사를 하겠다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오승환 때는 처음이라 우리가 갔을 때 사람이 없었는데 (강)정호랑 갔을 때는 소문이 났는지 다른 테이블에도 손님이 계셨고, 우리를 알아본 분들은 사인 받으려고 기다리시더라고요. 그래도 반갑게 인사 나눴어요. 오늘(7월 1일) 현수랑 함께 가면 당분간 대접할 일은 없습니다. 계속된 ‘접대’로 지갑 사정이 영 좋지 않아요(웃음).” 오승환은 그 식당에 다녀온 후 기자들에게 “정말 맛있게 고기를 먹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선 상상도 못하는 맛이었다”며 흐뭇해했다. 이대호는 고기에 가장 ‘집중’한 이로 강정호를 꼽았다. “잘 먹더라고요. 정호가 맛있게 먹으니까 기분 좋았어요. 저도 덕분에 정호랑 이런저런 수다도 떨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좋아했으니 오늘 가는 현수도 분명 만족할 거예요.” 1일 경기 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마친 이대호. 곧장 휴대폰을 들고선 원정팀 클럽하우스에 있는 김현수에게 전화를 건다. “현수, 뭐하노? 다 끝났나? 끝났음 고기 먹으러 가자!” 이대호는 이날 인터뷰에서 기자들에게 재미있는 뒷담화를 전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기자들은 배꼽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볼티모어의 마크 트럼보가 안타 치고 1루에 와선 ‘맹구 아느냐, 맹구 친구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니가 맹구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까 ‘오늘 밤에 한식당에 가느냐’고 또 물었어요. 메이저리그에 와서 현수 별명인 ‘맹구’를 트럼보한테 직접 전해들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만큼 현수가 팀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