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2017년 KBO 신인 1차 지명이 끝났다. 투수 9명과 내야수 1명이 10개 구단 1차 지명의 영광을 안았다. 1차 지명은 아마추어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혜택이다. 억대 계약금을 보장 받고, 다른 신인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아들 이정후(휘문고)가 넥센에 1차 지명된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지명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모여 자축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숱한 선수들이 1차 지명을 받고 프로에 발을 내디뎠다. 팀의 간판스타로 성장한 선수도 있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인물도 있다. 처음에는 고전하다 다른 팀에 가서 꽃을 피운 사례도 있다. 그동안 KBO 1차 지명을 통해 어떤 선수들이 나타났을까.
# 초창기 프로야구, 제한 없이 다 뽑았다
1차 지명 방식은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쳤다. 초창기에는 1차 지명에 제한이 없었다. 프로야구 자체가 지역 연고제를 바탕으로 출범했으니, 신인 수급도 각 구단 연고 지역 출신들을 최대한 많이 뽑는 데 의의를 뒀다. 연고 지역 고교 출신 선수라면 누구든 해당 구단이 인원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지명할 수 있었다. 1차 지명에서 제외된 선수들이 2차 지명에 나와 다른 지역 팀의 선택을 받는 식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주요 선수들은 1차 지명에서 대부분 선택됐다. 1986년 신생팀 빙그레가 창단하면서 처음으로 한도가 생겼지만, 최대 10명까지는 지명 가능했다.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자연스럽게 프로야구 초창기의 각 팀 프랜차이즈 스타들은 대부분 1차 지명 선수들 안에서 나왔다. 1983년(이하 입단연도 기준) 프로야구 첫 신인 1차 지명으로 뽑은 선수들 가운데는 김시진 양일환 김동재 장효조 황병일(삼성), 장호연 한대화 박종훈(OB·당시 대전 연고), 최동원 심재원 한문연 박영태 우경하 유두열(롯데), 임호균(삼미) 등이 포함돼 있었다.
1984년에도 문희수(해태), 김성래(삼성), 김진욱 윤석환 김광림(OB), 윤학길 정인교 조성옥(롯데), 최계훈(삼미) 등이 나왔고, 1985년엔 선동열 이순철(해태), 이종두 김성갑 김용국(삼성), 김용수 정삼흠 박흥식(MBC), 양상문 한영준(롯데)이 1차 지명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0명으로 제한이 생긴 1986년에도 인재가 많았다. 김정수 신동수 장채근 이건열 김평호(해태), 성준(삼성), 김건우 김태원 서효인 민경삼(MBC), 박노준 임채섭(OB), 윤학길 박동희(롯데), 김동기 이광근(청보), 한희민 이효봉(빙그레) 등이 배출됐다. 모두 선수로 한 시절을 풍미했거나, 현재까지 야구계에 남아 한 획을 긋고 있는 인물들이다.
# 1차 지명 축소와 고졸 우선 지명
실질적으로 ‘1차’ 지명이라는 의미가 생길 만큼 인원이 줄어든 건 이듬해인 1987년이다. 규모가 3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제8구단 쌍방울이 참여한 1990년에는 2명,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아예 1명으로 각각 줄었다. 대신 1999년까지는 고졸 우선 지명이 시행됐다. 연고 지역 고졸 선수에 한해 드래프트 전에 먼저 지명할 수 있는 제도였다. 삼성 이승엽, 해태 임창용, 빙그레 정민철, OB 박명환, 현대 김수경 등이 이 제도를 통해 입단해 팀의 간판으로 성장했다. 김선우도 두산에 우선 지명을 받은 뒤 메이저리그로 떠났다가 유턴하면서 두산 유니폼을 입은 케이스다.
1차 지명이 처음 3명으로 축소된 1987년에는 백인호 박철우(해태), 류중일 강기웅(삼성), 노찬엽(MBC)이 나타났다. 1988년에는 조계현(해태), 송진우(빙그레)가 탄생했다. 1989년 1차 지명 선수 가운데선 이강철(해태)이 독보적으로 성공했다. 1990년에는 김경기(태평양), 김동수(LG), 공필성(롯데)이 두각을 나타냈다.
# 1990년대 1차 지명, 그야말로 스타의 산실
1991년부터는 1차 지명 선수를 단 한 명만 고를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실패 확률이 높아졌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차 지명 선수는 ‘당연히 잘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기 때문에, 각 구단 스카우트들은 더 골치 아픈 선택을 해야 한다.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다. 1차 지명 성공 사례보다 실패 사례가 세간에 더 유명한 이유다.
실제로 1인 지명이 처음 시작된 1991년 해태는 거포 유망주 김기태 대신 투수 오희주를 골랐다. 김기태는 특별 지명으로 쌍방울에 갔다. 결과는 현재 둘의 지명도가 말해준다. 김기태는 홈런을 뻥뻥 날리며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로 성장했고, 오희주는 4년간 3승만 올렸다.
2006년 SK가 동산고 투수 류현진 대신 인천고 포수 이재원을 1차 지명한 사례도 여전히 회자된다. 지금은 이재원도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 잡았지만, 데뷔 직후 류현진의 행보가 워낙 막강했다. 잊을 만하면 ‘류현진을 놓친’ SK의 선택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여전히 1990년대 1차 지명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잘할 선수는 잘했다. 1990년대 1차 지명 선수 가운데 송구홍 이상훈 유지현 심재학 이병규(9번) 조인성(LG), 박정태 손민한(롯데), 조규제 이진영(쌍방울), 박재홍 이종범 정성훈(해태), 김태한 양준혁 강동우(삼성), 정민태 최상덕(태평양), 임선동(LG), 구대성 홍원기(빙그레·한화), 최기문 김동주 홍성흔(OB) 등이 스타로 성장했다. 특히 1993년은 구대성, 양준혁, 이종범, 이상훈이 동시에 1차 지명을 받은 무시무시한 해였다.
입단 초기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오래 살아남아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도 있다. 1997년 현대가 1차 지명한 최영필(현 KIA)과 1999년 한화 1차 지명 선수인 박정진이다.
2006년 1차 지명에서 류현진을 놓친 SK는 다음해인 2007년 ‘에이스’ 김광현을 품에 안았다. 사진은 SK 김광현.
2000년부터는 아예 고졸 우선지명 제도도 없어졌다. 지금처럼 지역 연고 우선의 1차 지명 1인과 전원 드래프트 형식의 2차 지명으로 틀이 잡혔다. 2007년에만 한시적으로 1차 지명 선수를 두 명 뽑았을 뿐, 지금과 같은 한 명 선발 원칙이 계속 고수됐다. 단, 서울 입성에 차질이 생기면서 연고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현대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1차 지명 선수를 뽑지 못하는 불이익을 겪었다. 2000년대 초반 최강팀이었던 현대가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린 원인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굵직굵직한 선수들이 1차 지명을 통해 등장했다. 2000년 삼성 배영수, 2001년 한화 김태균, SK 정상호, LG 이동현이 그 안에 포함된다. 롯데는 2001년 연고지 대형 유망주를 1차 지명했지만 계약에는 실패했다.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텍사스 추신수다. 2002년에는 삼성 권혁과 KIA 김진우, 2003년에는 두산 노경은, 한화 안영명, LG 박경수, SK 송은범, 2004년에는 삼성 박석민, 두산 김재호, 2005년에는 SK 최정이 각각 1차 지명으로 선택 받았다. 2006년에는 앞서 언급한 SK 이재원과 한화 유원상, KIA 한기주가 주요 선수로 꼽힌다.
유일하게 두 명을 뽑을 수 있었던 2007년은 SK에게 기념비적인 해다. 에이스 김광현을 품에 안았다. 두산은 가장 확실한 실속을 챙겼다. 투수 임태훈과 이용찬을 뽑아 2007년과 2009년 신인왕으로 키웠다. 롯데는 경남고 원투펀치인 투수 이재곤과 이상화를 데려왔다. 다시 1인 지명으로 돌아간 2008년에는 두산 진야곱과 롯데 장성우, 2009년에는 삼성 김상수, LG 오지환, 히어로즈 강윤구가 각각 1차 지명으로 데뷔했다.
# 2010년부터 4년간은 전면 드래프트
1차 지명은 한때 폐지되기도 했다. 지역마다 고교 유망주들의 불균형이 심해 특정 팀이 계속 이득을 본다는 불만이 높아진 탓이다. 전력 평준화를 위해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전면 드래프트가 시행됐다. 이 시기에 연고 지역과 관계없이 소속팀에 1라운드로 뽑힌 선수들이 바로 심동섭 한승혁(KIA), 심창민(삼성), 유창식 하주석(한화), 문승원(SK), 윤명준(두산), 한현희 조상우(넥센), 박민우(NC) 등이다. KIA로 트레이드된 유창식을 제외하면, 각 팀이 미래의 동력이 될 선수들을 쏠쏠하게 뽑았다. 이들 대부분이 현재 소속팀에서 주축 멤버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전면 드래프트는 4년 만에 다시 폐지됐다. 프로야구의 근간인 지역 연고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반발이 심했다. 일단 프로 구단들이 연고 지역 아마 팀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1차 지명이 사라지면서 대형 유망주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줄었다. 동시에 해외 유출이 많아졌다. 이런 단점이 고개를 들면서 결국 다시 1차 지명이 부활했다.
# 부활한 1차 지명, 최근 성공 확률은?
다시 시작된 2014년 신인 1차 지명에는 최초로 10개 구단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 3년간 1차 지명 선수 가운데 현재 1군에서 붙박이로 활약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2014년 신인으로 뽑힌 넥센 임병욱과 kt 박세웅, 2015년에 지명된 넥센 최원태와 kt 엄상백 정도가 야구팬에게 낯익은 얼굴이다. 롯데로 트레이드돼 꾸준히 선발 등판하고 있는 박세웅을 제외하면, 나머지 셋도 아직 주전 선수로 성장하고 있는 단계다. 2015년 1차 지명 선수 가운데는 아직 프로에서 자리를 잡은 선수가 없다. 갈수록 프로와 아마의 격차가 커지면서 신인이 즉시 전력으로 활약하는 빈도도 낮아진 탓이다. 이제 스카우트들은 “최소한 3~4년, 더 나아가 5~6년은 걸려야 1차 지명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는 롯데에 1차 지명된 부산고 투수 윤성빈이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다. 고교생인데 이미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져 화제를 모았다. 메이저리그의 관심도 끊임없이 받았다. 결국 롯데와 계약금 4억 5000만 원을 받고 입단 계약했다. 앞서 언급한 이종범 위원의 아들 이정후도 계약금 2억 원을 받고 넥센 유니폼을 입었다. 이미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염경엽 감독은 일단 이정후를 2군에서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KIA 한기주, 10년 전 10억 계약금 ‘넘사벽’ 2006년 KIA 한기주는 역대 최고 계약금인 10억 원에 사인했다. 박은숙 기자 이 때문에 1차 지명 신인 선수들의 몸값도 점점 현실화되는 추세다. 프로에서 검증된 FA 선수들의 몸값과 반비례하고 있다. 어차피 프로 1년차들의 연봉은 모두 똑같이 정해져 있다. 계약금이 곧 그들의 가치와 기대치를 입증한다. 과거 1차 지명 선수들은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요즘은 5억 원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2006년 KIA 한기주는 역대 최고액인 10억 원에 사인했다.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로 주목 받았던 그해 최대어였다. 역대 신인 계약금 2위 선수들과도 3억 원이나 차이가 난다. 그 다음에는 1997년 LG 임선동, 2002년 KIA 김진우, 2011년 한화 유창식이 나란히 7억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세 선수 모두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와도 경쟁이 붙으면서 몸값이 더 올랐다. 특히 임선동의 7억 원은 1997년 당시 물가를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천문학적 금액이다. 2005년에는 두산에 1차 지명된 투수 김명제가 6억 원을 받았다. 이후 8년이 흐른 2013년에 NC 윤형배가 다시 6억 원을 받고 입단했다. 2006년 한화 유원상과 2009년 두산 성영훈은 각각 5억 5000만 원에 계약했다. 고교 시절 보여준 가능성을 프로에 와서도 펼쳐 달라는 의미가 담긴 금액들이었다. 2002년 현대 조용준(5억 4000만 원)과 2001년 삼성 이정호(5억 3000만 원), 2004년 롯데 김수화(5억 3000만 원) 역시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역대 계약금 순위 톱10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96년과 1997년에 차례로 롯데에 입단한 차명주와 손민한(이상 5억 원)도 당시 그들에 대한 구단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몸값으로 보여준다. 2007년 SK에 입단한 김광현 역시 5억 원이 적힌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러나 최근 5년간은 계약금 5억 원을 넘긴 선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김광현 이후에는 2013년 입단한 윤형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올해 최대어인 부산고 윤성빈이 5억 원 돌파에 대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4억 5000만 원에 사인했다. 물론 많은 금액이지만, 윤성빈의 화제성에 비해서는 이전 선수들에 한참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수도권 한 구단 스카우트는 “요즘은 아무리 수준급 1차 지명 선수라도 몸값이 3억~4억 원을 넘기기는 어렵다. 그만큼 리스크가 커졌다는 의미”라고 귀띔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