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오전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과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유가족실종자모임,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화,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부산대책위원회가 참석해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2016년 7월 6일 오전 10시 국회 정론관에 어두운 표정을 머금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거 입장했다. 그들 가슴팍엔 조그만 피켓이 들려있었다. 피켓엔 ‘진상을 규명하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들이었다. 피해자라기 보단 생존자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그 만큼 당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규모도 컸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회에 선 이유는 분명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가해자들은 솜방망이 처벌만 받은 채 진실은 낱낱이 묻혔다. 25년이 지난 2012년 생존자였던 한종선 씨(당시 9세)가 1인 시위에 나서면서 피해자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정치권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지만 지난 19대 국회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이하 진상규명법)’ 제정에 실패했다. 피해자들은 어렵사리 용기를 내 세상에 나왔지만 현재까지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 19대 당시에도 진상규명법(안)을 대표 발의했던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번 20대 국회에서 다시 한 번 법안을 발의하면서 마련된 자리였다. 진상규명을 바라는 피해자들 입장에선 한 번의 실패 뒤 두 번째 도전인 셈이었다.
진상규명법의 골자와 목적은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국가의 책임을 밝혀내고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보상을 함에 있다. 법안에 따르면 이러한 진상규명 및 주요사안 결정을 위해 별도의 위원회(특정기간의 활동기간을 둠)를 설치하게 된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핵심은 역시 ‘국가의 책임’이다. 해당 사건은 단순히 한 시설 내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사건이 아니다. 무엇보다 해당 사건은 거리의 부랑자들의 처리(사실상 무단 포박 뒤 감금)를 규정한 당시 내무부 훈령(제410호)에 기인한다. 더 큰 문제는 복지시설이 국가의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 말단 직원들에 할당량까지 내려지며 멀쩡한 사람들까지 잡아 감금했다는 의혹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재완 방통대 교수는 해당 사건을 두고 “국가가 저지른 인권침해이며 범죄”라고 규정하며 “국가가 한 시설을 지원하고 비호하면서, 수용자들은 시설의 제테크 수단으로 전락해 인가 이하의 취급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탈출 당시 9세였던 생존자 한종선 씨.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이에 대해 신수현 부산대책위원회 대표는 “부산시는 당시 참혹한 인권유린을 알면서도 해태했으며 이러한 정황의 문서도 남아있다”라며 “법안제정과는 별도로 부산시는 독자적인 조례제정을 통해 최소한 피해자 및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사과하는 길에 앞장서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나마 세상에 피해자들의 실상이 알려지기까지는 사건 당시 9세였던 한종선 씨(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유가족․실종자 모임 대표)의 역할이 컸다. 2012년 처음 국회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선 한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 ‘살아남은 아이’를 세상에 공개해 진실 규명에 불을 붙였다.
피해자들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마이크를 잡은 한 씨의 목소리는 한 없이 떨렸다.
“또 다시 여기에 섰다. 9살 적 형제복지원에 잡혀 들어갔을 때 짐승이나 죄수들이나 받을 법한 수감번호 대신 지금 진실규명을 위한 피켓을 들고 있다…대한민국은 왜 전혀 변하지 않을까. 우리가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또 다른 시설에선 또 다른 고통을 안은 피해자들이 존재한다…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왜 우리는 강금 되어야 했는가. 왜 우리는 죽어야 했는가…19대 국회에서 발의한 법안은 폐기됐다. 반대 이유와 명분이나 이의제기조차 명확하지 않다. (20대 국회에선) 이유 없는 반대는 하지 말아 달라.”
앞서의 김재완 교수는 해당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 사건은 단순히 과거사로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에 대한 책무기도 하다. 진실을 앎으로서 앞으로 더 이상의 인권유린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여전히 문턱은 존재한다. 이는 19대 국회에서 고배를 마신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한 사회복지단체 관계자는 “해당 사건은 단순한 시설 내 사건이 아닌 정부 훈령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 소재 및 규명과 보상 문제에 있어선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라며 “또한 지역사회 및 정부기관과 강력한 커넥션이 있는 현재의 복지시설의 문제도 있다. 이러한 시설의 일부는 여전히 인권유린의 사각지대에 있다. 해당 사건의 진실규명이 법제화가 되고 여론이 형성된다면 현재의 시설들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설명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희대의 인권유린극 ‘형제복지원 사건’은 사건 당시 형제복지원 전경. 출처=<연합뉴스> 형제복지원은 1975년 박정희 정부의 부랑자 수용 정책(내무부 훈령 410조)에 따라 개설된 시설이다. 개설 이후 1987년까지 약 3000여 명이 강제 수용됐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이들 중 약 530여 명은 수용 중 각종 학대 행위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사건 직후 일부는 유골도 발견되고 일부는 이미 인근 병원에 해부용 시신으로 팔려나간 상태였다. 수감자들 중 상당수는 억울하게 시설로 끌려간 경우다. 가족이 있는 가장, 멀쩡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청년 등이 강제 수용됐다. 이 모든 것이 정부의 지원금을 노린 시설의 경영방침 탓이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원생 일부가 시설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면서 부터다. 이 과정에서 원생 한 명은 구타 중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시설 책임자인 전역군인 박창근은 당시 횡령 등의 혐의로만 고작 2년 형을 선고받았을 뿐 나머지 인권유린 및 살인 등의 혐의는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됐다. 현재 박창근은 여전히 사회복지 사업체를 운영하며 상당한 자산가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