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름을 택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멋져보여서’다. 1970년대 한국 순화 운동이 불면서 바니걸즈가 ‘토끼소녀’로, 어니언즈가 ‘양파들’로, 템페스트를 ‘돌풍’이라 이름을 바꿔 부른 적이 있다. 이를 보고 대부분 ‘촌스럽다’고 말했다. 한글 표현이 영어나 조어에 비해 세련되지 못하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오히려 한글로 지은 아이돌 그룹명이 새로운 대세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그룹은 최근 데뷔한 걸그룹 구구단이다. 케이블채널 Mnet ‘프로듀스 101’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김세정이 속한 9인조 걸그룹의 이름이다. 이는 ‘9가지 매력을 가진 9명의 소녀들이 모인 극단’을 뜻하며 데뷔 전 소속사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내부에서 후보를 받은 후 내부 공모를 통해 결정했다.
‘구구단’은 9가지 매력을 가진 9명의 소녀들이 모인 극단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사진출처=구구단 공식 페이스북
구구단의 멤버 미나는 “처음에는 구구단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르다 보니까 잘 기억되는 이름인 것 같다”며 “지금은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의미가 좋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아이돌 그룹 BAP와 걸그룹 시크릿이 속한 TS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새롭게 선보인 걸그룹의 이름은 ‘소나무’다. 이는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이 걸그룹 역시 변함없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푸르게 성장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소나무라는 그룹명은 최근 구구단이 데뷔하며 한글 이름을 가진 걸그룹으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근 열린 소나무의 신곡 쇼케이스에서 멤버 민재는 “그룹을 소개할 때 이름을 듣고 당황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독특한 한국적 이름이라 멤버 개개인은 몰라도 소나무라는 그룹명은 아는 분들이 많다”며 “우리 역시 구구단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져서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보이그룹 중에서는 5인조 신인 그룹인 ‘크나큰’이 눈에 띈다. 이 그룹명은 문자 그대로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 또한 ‘K-팝의 문을 두드린다’(K-pop knock)라는 심오한 뜻도 포함하고 있다. 크나큰의 영문표기는 ‘KNK’로 꽤 인상적이다.
크나큰 멤버들의 평균 키는 무려 185cm가 넘는다. 때문에 ‘모델돌’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는 크나큰이라는 그들의 이름과도 잘 매치돼 한번 그들의 무대를 보고 나면 뇌리에 깊이 인상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름은 각 그룹들의 명운을 좌우하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작품의 행보가 이름 따라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름은 그들의 이미지를 결정짓고,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이름을 결정할 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사장님의 마음’이다.
구구단의 리더 하나는 “회사 대표님과 전 직원, 멤버들을 대상으로 공모해 나온 이름인데 대표님이 적극적으로 밀어서 직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정해졌다”며 “듣다보니까 또 좋은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구구단이라는 이름이 여러 후보 중에 하나였지만 대표님의 눈에 들었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소나무의 이름을 지을 때도 소속사 대표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푸르게 성장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사진출처=소나무 공식 페이스북
결과적으로 이런 이름은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대중과 업계에 그룹을 알리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대중에게 호감과 공감을 사지 못한 그룹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지을 때 고민을 거듭한다”며 “오랜 기간 가요계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여러 그룹을 이끌어 온 대표들의 ‘촉’을 믿을 때가 많다”고 전했다.
사실 한글이름을 보편화시킨 주인공은 소녀시대다. 걸그룹답게 ‘소녀’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단어는 향후 걸그룹 멤버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이후 ‘우주소녀’와 ‘여자친구’ 등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그룹명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같은 이유로 ‘소년’ 역시 그룹명의 단골손님이 됐다. 과거에는 슈퍼‘주니어’와 같이 영어 표현을 썼지만 요즘은 방탄소년단, 소년24와 같이 보이그룹임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름이 인기다.
한글이름이 각광받는 배경에는 외국어 그룹명이 범람하는 세태 속에 차별화를 꾀할 수 있다는 복안이 깔려 있다. 또한 중국 시장이 한류의 최대 공략지로 변모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사대주의가 강한 중국은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 만든 그룹명보다는 한자로도 병기할 수 있는 그룹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룹명은 세계에 한글을 알린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요즘 아이돌 그룹은 대부분 해외 시장을 무대로 활동한다. 그들의 이름이 해외팬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한글을 접하는 세계인이 많아진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콘서트를 열면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외국인들이 한목소리로 K-팝 그룹들의 이름을 연호한다”며 “그들이 ‘소녀시대’와 ‘방탄소년단’과 같은 한글을 막힘없이 외칠 때는 뭉클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