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투자자가 보관하고 있던 김 씨 부부 사진
“더 이상 만들 수 없을 때까지 요구했어요. 마치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이 계속 돈을 만들어 달라고, 아니 만들어야 한다고….” 지난 11일 오후 8시께, 10여 명의 투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통적으로 한 말이다. 투자자들은 다양했다. 가정주부부터 사업가, 법조인, 아이돌 그룹 출신 연예인, 외국인 등등. 이들 모두 10년 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동시장 인근에 나타난 한 부부에게 돈을 맡겼다.
투자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은 부부에게 단순히 여윳돈만 맡긴 게 아니었다. 부부는 주택 담보 대출부터 카드론 등 가능한 대출을 모두 받으라고 권유했고, 같은 방법으로 투자자들의 가족과 친지, 지인들의 돈까지 끌어 모았다. 여기에 한 투자자는 부모가 남긴 유산을 그대로 맡기는가 하면, 암 투병을 하다 받은 보험금 전액을 부부에게 건넨 투자자도 있었다.
이날 모인 투자자들의 투자금만 51억 8600만 원이다. 문제는 이 투자금은 최근 투자자들이 급하게 모여 확인한 금액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연락이 닿지 않는 투자자들이 대부분인 데다, 부부가 여러 개의 차명계좌를 사용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이들이 맡은 투자금 전액에 대한 확인이 현재 상황에선 불가능한 상태다. 투자자들은 자신들이 입수한 부부의 계좌 일부를 볼 때, 투자금은 100억 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600억대 자산가
투자자 A 씨는 수년 전, 교회를 다니는 지인을 통해 피부관리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김 아무개 씨(여‧47)를 만났다. 처음 김 씨와는 간혹 지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사이였다. 그런데 지난 2014년, 김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연히 A 씨의 남편이 법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김 씨가 A 씨에게 매일 3~5차례 전화를 하고 “밥을 사겠다”며 불러내는 등 적극적으로 친분을 쌓기 시작한 시점은 이때부터다.
김 씨는 A 씨에게 자신과 남편을 ‘600억대 자산가’라고 소개했다. 김 씨는 “스무 살부터 부모가 준 3억 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돈을 크게 벌었다. 현재는 12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월수입만 억대 이상이다. 남편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하고 돈을 크게 벌고 있다. 남편과 나의 재산을 합치면 600억 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씨의 씀씀이는 남달랐다. 명품 옷과 가방, 보석 등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다녔으며 늘 거액의 현금을 들고 다녔다. 한 끼에 수십만 원이 넘는 레스토랑으로 A 씨를 불러내 밥을 사면서도 종종 고가의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A 씨는 거절했지만 김 씨의 말솜씨를 이기지 못해 번번이 집으로 가져오는 날이 점점 늘었다.
그리고 2015년 1월, 김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피부관리실에 A 씨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법조인 아내라는 사람이 이렇게 검소하게 다녀서야 되겠나. 내가 부자 되는 법을 알려주겠다. 돈을 싸들고 와서 제발 자기 돈 좀 맡아달라고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나는 아무나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믿을 만한 사람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특별히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문 내지 마라. 나만 믿고,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
# 현금에 대출까지
처음부터 김 씨를 믿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김 씨는 불안해하는 A 씨에게 “남편이 사실은 오릭스캐피탈과 러시앤캐쉬, 농협은행 등 금융기관과 대부업체 등에 대규모로 투자를 하는 사람이다. 남편이 고율의 수익을 얻고 있으니, 남편을 통해 투자를 하면 기관의 영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월 1~2%의 이자를 지급하겠다”며 “원금은 반환 요청을 하면 언제든지 즉시 반환을 보장한다. 얼마 전 다른 투자자도 돈을 맡겼다가 원금을 찾아가 아파트를 샀다”고 말했다.
A 씨는 김 씨에게 지난 2015년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총 14억 원을 맡겼다. 김 씨는 A 씨에게 “당장 운용이 가능한 현금이 없으면 주택 담보 대출이나 카드론을 받으라”고 말했다. 다시는 없을 기회라는 말과 함께였다. A 씨는 대출을 받고,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 5000만 원과 동생의 대출금까지 모을 수 있는 돈은 모두 모아 김 씨에게 건넸다. 그동안 김 씨와 만나오면서 쌓은 신뢰와 함께 원금을 즉시 반환받았다는 투자자들의 사례를 듣고 A 씨는 확신을 갖게 됐다.
김 씨는 매달 약속한 이자를 정상적으로 지급했다. 다만 원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차일피일 미루거나 화제를 바꿨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A 씨가 “경찰 신고를 고려하고 있다”며 강력히 항의하자, 김 씨는 남편과 함께 나타나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다”며 원금 반환을 거부했다. A 씨는 결국 지난 5월 중순 경찰 신고와 함께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김 씨 부부는 여기서부터 덜미를 잡힌다.
A 씨 측이 소송 과정에서 일부 입수한 김 씨 부부의 통장 거래 내역을 보면, 김 씨 부부의 이자 ‘돌려막기’ 정황이 확인된다. A 씨가 5000만 원을 입금하면 같은날 즉시 현재 투자자로 확인된 B 씨에게 3500만 원을 지급했다. 이후 3000만 원을 입금한 날에는 또 다른 투자자에게 1000만 원을, 7000만 원을 입금하면 4000만 원을 지급하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정황상 전형적인 폰지 사기로 보인다. 자금을 운용해 이익을 배당금으로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돈을 모아, 실제로는 새로 출자한 투자자의 돈을 기존 투자자에게 전달하는 다단계 금융 사기”라고 귀띔했다.
A 씨는 통장 거래 내역에서 확인된 투자자들에게 앞서의 사실을 알렸고, 일부 투자자들이 김 씨에게 원금 반환을 요구했지만, 김 씨 부부는 “A 씨 측에서 계좌를 막아 반환이 어렵다”며 미뤘다. 항의하는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김 씨 부부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 계획적 사기?
일부 투자자들은 잠적한 김 씨 부부를 여전히 믿고 있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알고 지낸 데다 그동안의 모습을 볼 때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사기를 계획하고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또 다른 투자자들이 확인한 김 씨 부부의 행적을 보면, 김 씨 부부는 매달 약속한 이자를 정상적으로 지급했지만 원금을 반환받은 투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약속한 이자마저도 2012년부터 매년 2~3%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한 투자자는 “김 씨의 투자 비법은 일종의 돌려막기에 불과하다. 이자로 수억 원을 주다 보니 새 투자자가 없으면 결국 들통 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김 씨 부부는 일부 투자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주총회를 통해 결정된 사항이다” “법인세 문제가 있다”는 등의 설명을 통해 이자를 지속적으로 낮췄다.
또한 김 씨 부부가 거래에서 주로 차명계좌와 타인의 명의로 개설된 휴대폰을 사용했다는 점도 ‘계획적 사기’ 의혹에 힘을 싣는다. 이들 부부 명의로 된 통장에는 30만 원이 전부거나, 거래 내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부터 잠적하기 전까지 10년간 김 씨 부부가 사용한 통장과 휴대폰은 대부분 일부 투자자들의 명의로 개설했고, 이를 통해 투자금을 받거나 이자를 지급했다.
또한 김 씨 부부의 주민등록상 주거지는 건물이 없는 재개발 지역이었던 데다, 자신들이 매수했거나 전세로 살고 있다고 설명했던 강남의 고급 빌라, 아파트 등은 월세였다. 그런데 월세마저 제대로 내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운영하고 있던 상가, 사업체 등의 월세와 보증금도 수개월째 밀려있는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김 씨 부부는 투자자들에게 통장과 사업체 등에 대해 “‘협력사 CEO’ ‘남편과 함께 일하는 대표이사’ 등의 명의다”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이 처음 서로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이 CEO라고 들었다” “대표이사라고 들었다”는 등 웃지못할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여기에 김 씨의 피부관리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한 투자자는 공범으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피부관리사 면허가 없던 김 씨는 해당 투자자에게 면허를 빌리는 조건으로 동업을 제안했고, 현금 1000만 원을 요구했다. 이후 “사업에 필요하다”며 카드와 통장 개설을 요구했는데, 김 씨가 이 카드와 통장도 이자 지급에 활용했다. 결국 앞서의 투자자는 명의를 빌려주고 차명계좌를 운용한 공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해당 투자자는 “통장에 들어온 거액의 돈을 구경해본 적도 없고, 오히려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김 씨에게 넘겼다.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 투자자들, 국가상대 소송 제기
김 씨 부부는 지난 7월 초,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자취를 감췄다. 지난 8일 베트남으로 출국한 사실이 확인된 뒤로 행방이 묘연하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경찰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앞서 일부 투자자들이 지난 6월부터 경찰에 김 씨 부부에 대해 수차례 출국금지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경찰이 안일한 대처를 했다”며 지난 11일 국가를 상대로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처음 사건을 접수한 강남 경찰서 관계자는 “최초 고소 내용과 김 씨 부부 명의의 통장 일부를 확인한 결과 내용이 상이해 출국금지요청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수사는 앞으로 계속할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현재 투자자들은 전 재산을 잃은 데다, 대출까지 받은 상태라 당장 다음 달부터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이자를 갚아야 한다. “사기가 의심되지 않았나”라는 기자에 질문에 한 투자자는 “김 씨 부부를 믿고 투자한 게 아니다. 나의 지인이 이자를 받고 있었고, 그 지인을 믿고 전 재산을 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투자자는 “김 씨는 투자자들에게 늘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싶다. 나만 믿고, 내 말만 따르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김 씨의 주변에서 빛이 보일 정도였다. 지금은 스스로가 원망스럽다”고 한탄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대부업체 CEO? 자수성가 사업가? 실체 없는 부부 A 씨 측 소송 이후로 확인된 투자자들이 기억하는 김 씨 부부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그러면서도 정확한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 투자자에게 김 씨의 남편 조 아무개 씨는 대부업체의 CEO였고, 또 다른 투자자에게는 강남에서 유흥주점과 식당 등을 여러 개 운영하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논현동 인근에 위치한 사우나를 자주 찾았고, A 씨를 만날 때처럼 늘 명품으로 자신들을 치장하고 다녔다. 이렇게 모인 투자자들에게는 A 씨의 경우처럼 “거액의 투자금을 운용하고 있다”면서도 “매달 28%의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유혹해 투자금을 건네 받았다. 투자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김 씨 부부는 10년 전인 2006년부터 이 같은 방법으로 투자금을 유치해온 것으로 확인된다. 논현동 영동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한 상인을 상대로 3억 원을 투자 받은 뒤로, 인근 피부관리실 원장으로 행세하며 주변 상인과 주부들을 상대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논현동 주변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지인의 지인, 가족 등도 투자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모두 자신의 재산에 더해 아파트 담보 대출, 남편 신용 대출, 카드 대출 등을 받았다. 돈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