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전 대표는 귀국 후 4일 뒤인 13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의 재검토 및 공론화를 요청했다. 사실상 수용 의사를 밝힌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정면충돌, 당 내전에 불을 지핀 것이다. 문 전 대표의 ‘네팔 구상’이 차기 대권 플랜 1단계라면 이제는 내부권력 구도의 주도권 다툼이다. 변수는 김 대표와의 관계 설정 및 차기 당 대표 선출을 위한 8·27 전당대회다. 이 지점이 ‘문재인 대선 플랜의 2단계’의 핵심이다.
김종인 대표와 문재인 전 대표
첫 번째 고비는 차기 당 대표와 견줄 만한 ‘살아있는 권력’인 김 대표 의중이다. 더민주의 차기 당 대표가 ‘앞선 지휘자’라면, 곧 대표직에서 내려올 김 대표는 ‘막후 지휘자’다. 그만큼 김 대표의 위상은 더민주 내에서 높다. 적어도 차기 대선 때까지 김 대표가 살아있는 권력으로 남을 것이란 얘기다. 김 대표와의 관계설정이 중요한 이유도 이 같은 ‘김종인 파워’와 무관치 않다.
최근 여의도 정가에선 김 대표가 당의 존립화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얘기가 퍼졌다. 김 대표는 8·27 전대 후 독일에서 야권 발 정권개편을 위한 새판짜기 구상에 돌입할 예정이다. 유력한 시나리오는 내각제를 고리로 한 창조적 파괴다. 여야의 최대 주주인 친박(친박근혜)계와 친노(친노무현)계를 동시에 치는, 해체 수준의 정계개편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김 대표는 4·13 총선 승리 이후 당 일각에서 제기된 ‘합의 추대론’의 원톱 후보였다. 총선 이후 더민주 내부 권력구도의 최대 변수가 ‘김종인·문재인’ 관계설정일 만큼, 김 대표가 당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김 대표는 여차하면 킹을 위한 길에 나설 수 있는 인사다. 구심점 없는 비노(비노무현)계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4의 길을 모색하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과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차기 대권 잠룡과의 연대 모색 등을 본격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른바 ‘김종인 발 새판 짜기’다.
적어도 문 전 대표는 그 이전의 대권 주자와는 다른, ‘지는 해’(전직 대표)와 ‘뜨는 해’(차기 당 대표) 등의 ‘삼각 조합’을 꾀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범주류 한 관계자는 “문 전 대표의 전대 개입은 스스로 행동반경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현실 가능성이 낮다”면서도 “전대 이후에도 ‘김종인 역할론’이 상당한 만큼, 문 전 대표를 비롯해 당에서 김 대표를 예우하면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대선 정국에서 킹과 킹메이커가 한 팀에서 정권교체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면, 문 전 대표와 김 대표는 ‘물과 기름’이다. 이들은 4·13 총선 과정에서 당 정체성을 비롯해 비례대표 선출 문제, 문재인 광주행 등에서 상당한 견해차를 노출한 바 있다. 사드 정국에서도 김 대표는 사실상 ‘수용’ 입장을 밝힌 반면, 문 전 대표는 “정부가 안보 위기를 조장한다”며 재검토 및 공론화를 주장했다. 네팔 구상을 마치고 귀국한 문 전 대표가 정치현안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문 전 대표의 네팔 구상이 국민 행복론을 통해 ‘여백의 미’를 나타낸 것이라면, 이명박근혜 정부 비판과 사드 반대론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권교체에 대한 소명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더민주 노선·이념 투쟁이 본격화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실제 김 대표는 문 전 대표의 사실상의 사드 반대에 대해 “개인 발언이 뭐 그리 대단하냐”며 “재검토하라고 한다고 재검토가 되겠어”라고 말했다.
둘은 총선 직후에도 더민주 지도체제를 놓고 충돌한 바 있다. 당시 김 대표는 문 전 대표를 향해 “낭떠러지에서 구해놨더니,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종인 합의추대론’을 둘러싼 갈등이 진실공방전으로 치닫자 이같이 말한 것이다. 당시 김 대표는 “더 이상 (문 전 대표를) 안 본다”라고까지 말했다.
비노계 한 관계자는 “김 대표가 문 전 대표를 차기 대권 주자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며 “이들이 ‘공동 운명체’를 형성하느냐, ‘불안한 동거체제’를 형성하느냐는 차기 대권의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킹인 문 전 대표와 양자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김 대표, 더민주 차기 당권 주자 간 치열한 ‘두뇌 싸움’의 막이 불가피한 셈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판도라 상자의 함수가 문 전 대표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망이다.
차기 대권 승리 방정식의 또 다른 변수는 더민주 새 당 대표다. 조직적인 오더를 통한 전대 개입은 없다. 어떤 후보가 당 대표로 선출되든 예선전 승리는 문 전 대표 몫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판을 넓혀 본선으로 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떤 후보가 당 대표가 되느냐는 최종 고지 선점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더민주 8·27 전대의 정치적 의미는 2017년 대선을 관리하는 ‘관리형 대표’다. 공정한 당내 경선부터 최종 후보 확정 뒤 대선까지 당을 진두지휘해야 한다. ‘당 원심력 최소화’ 및 ‘당 구심력 최대화’ 전략이 대선 직전 뽑히는 당 대표의 숙명적 과제인 셈이다. 상대로부터 자당의 대선 후보를 지키는 ‘방패 막’ 형성과 국면전환을 위한 ‘승부수’는 필수다. 때때로 대선 후보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사퇴하는, 이른바 ‘불쏘시개’ 역할은 옵션이다. 이 양자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과정에서 ‘타이밍 정치’와 ‘디테일’은 대권의 승리 방정식을 푸는 중요한 키다.
문 전 대표의 적극적인 개입은 없더라도, 당내 친노계 인사들은 이 같은 셈법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다만 김 대표가 4·13 총선을 거치면서 당 안팎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 전 대표는 차기 당 대표 및 전직 대표와의 조합을 풀어야만 본선 승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네 번(15대∼18대)의 대통령 선거를 보면 대선 직전 당 대표와 대권 승리의 함수는 뚜렷해진다. 야권이 승리한 15대(1997년) 대선 당시 당 대표는 조세형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 16대(2000년) 대선 땐 한화갑 새천년민주당 대표였다. 조세형은 10대 총선(1978년) 때 이철승의 권유로 신한민주당(신민당) 후보로 첫 원내 진입한 뒤 13대(1988년) 평화민주당(평민당)과 14대(1992년) 민주당 등을 거쳐 2000년 초반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함께했다. 1997년 땐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이끌어내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는 DJ의 강력한 카리스마도 한몫했지만, 상하 관계가 확실했던 DJ와 조순형의 관계는 당내 분란의 싹을 애초부터 없앴다.
16대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러닝메이트를 형성한 한화갑은 당내 경선 경쟁자였다. 화학적 결합에 실패한 이들은 불안한 동거체제를 형성했다. 동교동계 구파(권노갑)와 신파(한화갑)의 갈등은 물론, 개혁당 등 친노계가 가세한 세력 다툼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로 이어졌다. 이를 타개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호남·제주 등 네 곳의 광역자치단체장만 승리를 거두자 노 전 대통령은 즉각 재신임을 승부수로 던졌다. 노 전 대통령은 후보 교체 위기 때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식 승부사 기질로 정면 돌파, 본선행을 거머쥐었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전신) 대표는 조순(15대)·서청원(16대). 조순 대표는 꼬마 민주당 대선 후보를 하다가 이회창 후보의 신한국당과 ‘당 대 당’ 통합을 꾀하며 한나라당을 만들었다. 당명을 정한 이도 조 대표였다. 이 후보와 사실상 같은 위치에 있던 경쟁자였던 셈이다. 한나라당은 16대 대선 땐 대선 후보와 당 대표를 같은 날 선출, 계파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을 취했으나, 15대 때 YS 인형 화형식을 한 이회창과 상도동계인 서청원 간 결합의 시너지효과는 크지 않았다.
현 여권이 2연승을 거둔 17대와 18대 대선 당시 당 대표는 ‘강재섭·황우여’였다. 강재섭은 친박(친박근혜)계 지지로 당선된 이후 친이계 쪽으로 돌아섰고, 황우여는 범친박계 인사였다. 야권은 ‘오충일(17대)·이해찬(18대)’ 대표 체제였다. 오충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출신의 정치력이 약한 관리형 대표의 한계를 지녔다. 2007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과 친노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동영 등 비노계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 오충일 대표 체제를 세웠다. 하지만 정치인이 아닌 ‘오충일 체제’의 한계는 명확했다. 2012년 대선 땐 친노계의 좌장인 이해찬 대표 체제였지만, ‘계파 패권주의’에 대한 당 안팎의 거센 비난에 직면해 결국 2선 후퇴했다.
차기 대권을 차지한 쪽은 자파 소속의 ‘충성파 대표’(조세형·황우여)나 대선 후보와 공조행보를 위해 말을 갈아타는 대표(강재섭)를 뒀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 스스로 승부사 역할(노무현)을 해야 한다. 대선 직전 당 대표는 불쏘시개(이해찬) 역할도 감내해야 하는 ‘희생의 아이콘’이어야 한다.
이제 관심은 문 전 대표에게 쏠린다. 문 전 대표의 4년 전 히든카드였던 ‘이(이해찬)·박(박지원)’ 연대는 실패로 돌아갔다. 친노계와 비노계의 전면전 결합은커녕 이·박 담합 논란으로 번졌다. 이제는 김 대표와 차기 당권 도전을 천명한 ‘송영길·추미애’ 등과의 관계설정이 대선 승부의 방향타라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
‘주류 친노 표심 잡아라’ 송영길 추미애, 문재인에 러브콜 더불어민주당 8·27 전당대회 최대 변수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추미애·송영길 의원의 ‘러브콜’이 노골화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친노vs비노’ 구도에 반대하지만, 전대 구도가 더민주 양대 변수인 ‘친노·호남’으로 좁혀지면서 ‘문심’(문재인 의중)을 향한 이들의 구애 작전이 한층 빨라졌다는 게 당 내부 인사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문 전 대표의 지난 9일 귀국길에 송 의원 부인 남영신 씨가 꽃다발을 전달한 게 대표적이다. 참모그룹 내부에선 송 의원이 직접 나가는 방안도 거론됐지만, ‘친노 프레임’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 부인이 대신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전대 초반 ‘친노 프레임’에 선을 그었던 송 의원이 ‘문심’ 잡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송 의원 측은 친노(친노무현)계 표 지지와 관련해 “호남을 대표하는 게 누구냐”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송영길 없이 호남민심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킬레스건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 내내 불편했던 친노계와의 관계 해소다. 더민주 한 관계자는 “송 의원뿐 아니라 당내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때때로 충돌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고 회고했다. 또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의 86그룹 멤버인 우상호 원내대표와 이인영 최고위원이 그간 당내 경선에서 드러낸 ‘호남 외연 확장’도 극복할 과제다. 추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가 전대 초반부터 친노 및 친문 직계를 전방위로 훑으면서 범주류 표심 잡기에 사활을 걸었다. 추 의원은 “당 대표는 대선 후보를 흔드는 사람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 “(문 전 대표는) 굉장히 강한 펀치를 계속 맞는데도 1위를 유지하는 (대선) 후보” 등의 발언을 하며 친노 표심을 공략했다. 추 의원 참모그룹은 물밑에서 ‘친노 표심은 추미애’라며 ‘문심’(문재인 의중)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점은 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다. 당시 추 의원은 열린우리당 합류를 거부한 채 민주당에 남아있었다. 조순형 당시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은 한나라당과 함께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무현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추 의원에게도 원죄 아닌 원죄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추 의원은 지난달 정봉주 전 의원이 사회를 보는 팟캐스트 ‘전국구’에 출연해 “의원총회에서 ‘탄핵 불가론’을 얘기했었다”면서 당시 민주당에 외부인사로 참여했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거론하며 ‘탄핵에 긍정적’이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허튼소리”라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들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옥쇄 파동’으로 휩싸이면서 불편한 관계를 형성한 바 있다. 비주류 한 당직자는 “참신한 비전을 보여줘야 할 제1야당 전대가 사실상 주류에 대한 줄서기로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흥행도 비전도 감동도 없는 전대로 전락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