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해 하는 말 속에서 말의 내용보다는 말하는 그 사람이 확인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 “1%의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 결국은 파면을 부른 교육부 고위직 공무원의, 말 같지도 않은 말 속에는 말한 그 사람이 있다. 신분제 속에서 그가 누리고 싶었던 삶은 개돼지 같은 민중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자기네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삶이었을까. 나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하는 문장을 마음속에 새겨본 일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백년대계의 교육정책을 짜고 있었다니 끔찍하다.
그런 그 사람이 MB정부 때는 친서민 교육정책을 홍보한 바로 그 당사자였단다. 그런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때 그 ‘친서민 교육정책’이라는 것도 시행을 염두에 두고 신념과 철학으로 만든 정책이 아니라 위에서 좋아할 만한 개념의 장난질, 보여주기 위한 개념의 분탕질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나는 정말 궁금하다. 그는 정말 1%였을까. 혹 그는 99% 위에서 군림하는 1%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개와 돼지를 모독하며 민중을 비하한 그의 오만하고 무지한 발언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짐작된다. 그는 1%의 특권층을 만드는 시스템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권력의 하인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사실 사석의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한 얘기가 여과 없이 보도되는 상황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래서 더 정직하게 만나게 된 한 고위공직자의 민낯은 분노를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혹 그 민낯이 세계관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1%의 민낯인 것은 아닌지.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사는 민중을 개돼지에 비유하는 특권층이 사람도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려 들겠는가. 독선과 불통은 바로 함께 사는 세상이라 믿지 않는 바로 거기에서 생기는 것인데.
사람은 그가 무시하고 두려워하던 바로 그것이 되어봄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이제 그는 그를 1%라 믿게 만들었던 귀한 직위를 잃고 99%가 됨으로써 99%의 분노와 슬픔을 이해하며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에는 99%나 1%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에게 100%인 고유한 삶이 있고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누구나에게 고유한 그 이야기를 인정해야 소통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