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시간을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사뭇 달랐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왕조현 등이 출연하는 영화들이 한국 극장가를 장악했다. 장르도 다양했다. 누아르를 대표하는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을 비롯해 도박을 소재로 삼았던 <지존무상>과 <정전자>, 판타지의 대명사인 <천녀유혼> 등이 한국 관객들을 쥐락펴락했다.
왕대륙은 지난 5월 한국에서 개봉된 ‘나의 소녀시대’의 흥행으로 최근 한국을 재방문했다.
지난 13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에서는 대만 배우 왕대륙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한국에서 지난 5월 개봉된 영화 <나의 소녀시대> 상영 당시 내한했던 그는 한국 내 인기가 치솟자 다시금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한 당시 “관객 50만 명이 들면 다시 한국에 오겠다”고 선언했던 왕대륙은 이 영화의 흥행이 40만 명에 그쳤지만 한국을 재방문했다. 국내 흥행작에 비하면 높은 스코어는 아니지만 최근 중국 영화의 한국 내 흥행 스코어가 저조하고, 왕대륙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왕대륙은 이번 한국 방문 기간에 ‘팬 미팅’도 가졌다. 영화 홍보가 목적이었던 5월 방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특별한 콘텐츠가 없어도 왕대륙만을 보기 위해 모이는 한국 팬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에 다시 오게 돼 기쁘다. <나의 소녀시대>가 50만 명을 넘지는 못했지만 한국 팬들을 다시 보기 위해 왔다”며 “첫 한국 팬 미팅인 만큼 스트레스도 많고 긴장되고 설렌다”고 말했다.
왕대륙은 이 인기를 발판 삼아 한류스타들과 협업하는 것도 꿈꾸고 있다. 특히 대만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대만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박신혜를 향한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화면 질감이나 미장센이 뛰어난 한국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다”며 “박신혜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떤 역할도 상관없고. 원빈과는 형제 역할을 맡고 싶다”고 덧붙였다.
왕대륙에 앞서 ‘조용히’ 내한했던 스타가 있다. 바로 중국 배우 겸 가수 허위주다. 그가 한국에 다녀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고, 그의 공연 소식 역시 몇몇 언론에서 다루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의 공연장은 한국 관객들로 꽉 찼고 3000여 장의 공연 티켓은 판매를 시작한 후 불과 3분 만에 매진됐다. 그가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장면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됐을 정도로 허위주의 인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허위주와 황경유가 출연한 중국 웹드라마 ‘상은’ 포스터.
중국 연예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한국 팬들이 중국 스타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놀랐다”며 “허위주, 왕대륙의 인기는 한류 위주로 재편된 아시아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장 흐름은 한 방향이었다. 한국의 스타와 콘텐츠가 중국에 진출하고, 중국의 자본이 이들을 사들이거나 한국의 콘텐츠에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중국의 스타와 콘텐츠가 다시금 한국에서 각광받는 건 중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선진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류가 중국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트렌드를 선도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인 데다 보수적인 중국이 한국의 10~20년 전 이야기를 답습하고 있는 데 반해 한류는 새로운 시도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한국을 보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학습을 반복한 중국은 달라지고 있다. 또한 한국의 유명 PD와 작가들이 거액을 받고 중국에 진출해 중국 콘텐츠의 질적 성장을 일구고 있다. 여기에 13억 인구 중에서 발굴한 뛰어난 외모와 끼를 가진 스타와 자본이 더해지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연예계 관계자는 “미주와 유럽인들이 동양인 한국의 콘텐츠에 열광하는 것은 인종이나 관습을 넘어 세련된 문화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인들도 잘 만든 중국 콘텐츠에 열광할 수 있다”며 “대중이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측면에서는 반갑지만, 중국의 성장이 한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