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막을 내린 2016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통합예선 최종일 대국에서 한국은 변상일 4단, 강승민 4단, 정대상 9단만이 승리, 32강에 겨루는 본선에 진출했다. 이들은 국가 시드를 배정받아 본선에 직행한 기존 강자 박정환 9단, 이세돌 9단, 강동윤 9단과 신세대 강자 이동훈 5단, 신진서 6단과 함께 오는 9월 5일 개막 예정인 본선에 출전하게 된다.
지난 7월 15일부터 20일까지 한국기원에서 열린 삼성화재배 통합예선전 전경. 본선 개막식은 9월 5일 경기도 일산 삼성화재 글로벌캠퍼스에서 열린다.
현재 대부분의 세계대회에서 채용하고 있는 통합예선전에서 한국이 중국에 밀리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4월에 열린 LG배 통합예선에서 한국은 5장에 그친 반면 중국은 11장을 가져갔고, 중국 주최 신아오배 세계바둑오픈에선 48장의 본선 티켓 중 한국이 12장, 중국이 36장을 획득했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안 된다. 한국바둑의 전성기라는 1990년 초부터 2010년대 초까지 약 20년 간 세계대회를 휩쓸 때도 양적인 면에서는 중국에 밀렸다. 다만 이창호, 조훈현, 이세돌 등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다는 기사들이 동시에 출현하면서 번갈아 우승컵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올해 삼성화재배 통합예선의 결과는 심각하다. 한국은 이번 대회 라운드별 중국 기사와의 대결에서 1회전 3승 12패(승률 20%), 2회전 17승 31패(35%), 3회전 7승 24패(19%), 준결승 3승 19패(16%), 결승 1승 3패(25%)를 기록했다. 다섯 번의 대결 중 네 번은 졌다는 얘기다. 이번 대회에서 드러난 한국바둑의 문제점을 짚어봤다.
#한국바둑, 허리가 없다
흔히 한국바둑은 허리가 약하다고 하는데 그나마 오랜 시간 허리 역할을 해온 이들이 ‘황소 삼총사’로 통칭되는 85년생 동갑내기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이었다. 이들은 이창호나 이세돌, 박정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모두 세계대회 우승컵을 한두 번 들어 올렸던 강자들이다. 김성룡 9단은 이들을 가리켜 “이창호나 이세돌과 동시대에 등장해서 그렇지 따로 떼어놓고 보면 황소 삼총사 개개인도 대단한 천재들이다. 만일 중국에서 이들이 나왔다면 구리, 창하오보다 못할 게 없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 기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최근 동반 부진 현상을 겪고 있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셋은 삼성화재배 통합예선에 출전했으나 모두 각조 준결승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조기 탈락했다. 이세돌 9단이 아직 쌩쌩하니 이들도 좀 더 버텨줄 것으로 믿었지만 역시 승부세계에서 서른을 넘긴 나이는 치명적인 핸디캡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영훈은 신아오배, LG배 32강전에서 잇달아 탈락했고, 최철한은 최근 9승 11패에 최근 세계대회 출전 이력도 없다. 얼마 전 결혼한 원성진도 부진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최근 20국에서 10승 10패를 기록 중이다. 여기에 김지석, 안성준, 조한승, 윤준상, 나현, 백홍석 등 국내 상위 랭커들의 저조한 성적도 중국에 열세를 보인 원인이 됐다.
변상일(왼쪽)은 중국의 자오춴위, 당이페이, 장웨이제를 연파해 한국바둑의 체면을 살렸다.
바둑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삼성화재배 통합예선전에서 한국이 남긴 성적은 부진하다 못해 참담할 정도다. 아무리 못해도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공부하는 학생들 같았으면 훈장님으로부터 회초리를 맞거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할 만큼 나쁘다. 많은 지원을 박고 있는 국가대표 상비군과 우리바둑의 근간인 한국바둑리그의 운영, 그리고 프로기사 실력 향상을 위한 방안 등 한국기원에서 세밀한 진단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라고 지적했다.
#위기의 한국여자바둑
2명을 선발하는 여자조에서 중국의 초강세와 한국의 부진은 이번 삼성화재배 통합예선 중 가장 눈길을 끌었다. 한국은 29명이나 예선에 출전했지만 고작 9명이 출전한 중국에 밀려 단 한 명도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가장 충격적인 결과. 여자 기사들은 이번에 중국 기사와 1회전부터 총 20번 대결해 2승 18패, 승률 10%에 그쳤다.
여자 기사들의 부진은 여자바둑리그가 출범했고 중국에 비해 여자바둑만큼은 우리가 층이 두텁다고 자부해왔던 터라 충격이 더했다. 결과도 결과지만 중국의 에이스 위즈잉이 점점 왕년의 ‘이창호화’한다는 것이 문제다. 현 시점에서 위즈잉의 독주를 막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고민거리다. 최정이 대등한 승부를 벌였지만 최근 6번의 대결에서는 1승 5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총 전적은 6승 11패). 위즈잉은 올해 한국여자바둑리그에 용병으로 출전해 10승 1패를 기록했었다.
한국에서 위즈잉의 적수가 보이지 않는데 이번 대회 결승에서 위즈잉을 밀어낸 것이 중국 기사라는 점이 또한 걸리는 대목이다. 신예 루자 2단이 위즈잉을 꺾고 본선에 올랐는데 루자는 권효진, 김혜민, 위즈잉을 차례로 꺾으면서 여자바둑계의 새로운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기사들의 집단 부진을 두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2년 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8강의 전부를 중국에 내줬는데, 곧이어 이어진 삼성화재배에서는 거꾸로 한국이 4강에 세 자리를 차지하더니 결승은 한국기사들의 차지가 된 적도 있었다는 것. 어차피 우승은 한 사람 몫이니 시드를 받은 우리의 에이스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튼 한국선수 8명은 20명의 중국선수 및 3명의 일본선수와 싸워야 한다. 이게 한국 주최의 대회인지 헷갈리기도 하는데, 일단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세돌, 박정환, 신진서 등 에이스들의 힘을 믿어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