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AlphaGo)’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인간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제2의 알파고’를 천명하고 나선 일본의 ‘젠(Zen)’이다. 바로 그 젠이 대국 파트너로 조혜연 9단을 지목했다. 조 9단과 젠의 대국은 2016 유럽바둑 콩그레스(European Go Congress) 기간에 펼쳐진다. 조 9단은 출국 직전 처음 대국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감정과 각오 그리고 전략 등 장문의 기고문을 <비즈한국>에 보내왔다. 그 ‘출사표’를 발췌·공개한다(원문은 <비즈한국> [독점공개] 제2알파고 ‘젠’과 결전, 조혜연 9단 ‘출사표’). |
대국 중인 조혜연 9단과 인공지능 프로그램 ‘젠’ 상징.
[비즈한국] “Will you play Zen6(젠6와 대국하겠는가)?”
매우 간결하고도 알기 쉬운 단 하나의 질문이 순간적으로 온몸에 전율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필자는 그때 깨달았다. 커제 9단과 중국 바둑계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공지능의 2차전이 될 알파고의 차기 대국 일정이 안갯속에 빠진 와중에 필자가 유럽으로부터 받은 한 통의 이메일을 통해서다. 필자도 짤막하게 답을 적어 보냈다.
“Yes, I will play Zen(젠과 대국하겠다).”
젠과의 대국을 수락한 이후부터 많은 것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기본적인 대국 조건(Game Conditions)은 어떻게 되는지, 젠을 개발한 일본 측 입장이나 이 대국을 주최한 유럽 바둑 콩그레스의 의도는 무엇인지, 왜 ‘조혜연’이라는 기사와 컨택(접촉)을 했는지.
① 대국 치수(핸디캡) : 대국 수락 당시 대국 치수는 미정이었으나, 2016년 7월 20일 현재 확정된 대국 치수는 흑 두 점 접바둑, 젠의 흑번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은 총호선(대등한 관계의 치수)으로 겨루었다.
② 대국 판수 : 단 한 판이다. 한 판만 두는 것은 아쉽다고 여겨 필자가 두 번째 판을 제안했지만, 일본 측은 거절 의사를 밝혀왔다. 속전속결이다. 인생도 어차피 한 번이 아닌가(You live only once).
③ 대국실 및 장소 : 대국 장소는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이지만, 대국실은 KGS 서버에 접속해서 둔다. 즉 이세돌 9단처럼 바둑판에 놓아보는 것이 아니라 필자가 서버에 접속하여 마우스로 대국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④ 제한시간 : 각자 20분 30초 1회. 필자도 속기에 단련되어 온 기나긴 시간이 있고, 한국여자바둑리그에서 주로 속기전에 기용되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짧으면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기계가 불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시판된 젠6과 두어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5초 내지 10초 바둑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⑤ 젠 : 젠6가 현재 시판되어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버전이다. 그러나 필자가 두게 될 상대는 젠6에서 젠19A로 바뀌더니, 그다음 ‘젠19X’로 바뀌었다. 젠19X의 진짜 기력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젠6와는 다른 버전일 것이다.
필자의 전략은 이렇다. 우선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이 첫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보여준 대국 결과로 확실히 드러났다. 객관적으로, 나를 타자화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절실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억누른 후에는, 젠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필요했다. 이미 필자의 많은 친구들이 시판된 젠6과 대국하고 그의 강점에 대해 두루 말해주었다. 친구들의 말만 들으면 젠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바둑 기사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젠의 의표를 찌를 수 있는, ‘숨겨진 약점 찾기’가 관건이다.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두 점 접바둑’이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바둑판 위 단 하나의 귀(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백이 귀 하나를 차지하면 흑이 나머지 귀를 두어, 첫 포진이 생성된다. 그렇다면, 화점은 선택지에서 일단 제외하기로 한다. 두 점 접바둑에서 화점을 둔다는 것은, 상대가 어지간히 약하거나 지도대국이 주요 목적일 때 훈련을 위해서다.
한 귀를 둘러싼 남은 선택지는 소목·외목·고목이다. 젠은 이미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의 대국에서 석 점으로 승리했는데, 이 대국에서 고바야시 9단이 선택한 첫 수는 고목이었다. 남은 것은 소목과 외목이다. 필자의 현재 마음은 외목에 상당히 기울어 있다. 세력바둑을 쌓기 위해서는 역시 3-5자리인 외목이 적절하다. 소목을 둔다면, 아마도 미니 중국식 포진을 펼치지 않을까 싶다.
조혜연 9단
젠과의 대국에서 성취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앞으로 ‘사람’이 인공지능과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여부다. 알파고-이세돌 이전 바둑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사람 최고수를 바둑에서 이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직관’을 들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기계학습을 통해 사람의 지식을 학습해버리면, 사람에게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직관은 별 쓸모없는 영역인 것일까.
아닐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지녔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생의 몸짓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나약한 희망을, 바둑을 두는 행위를 통해 나는 힘껏 확인해보고 싶다. 인공지능과의 조우를 앞에 두고.
조혜연 ㈜더바둑 대표이사·프로기사 9단
역대 최연소 입단 ‘3위’ 조혜연 9단은 1997년 조훈현, 이창호에 이어 역대 최연소 입단기록 3위(11세 10개월)를 기록하며 한국기원 프로기사에 입단한 이래 2003년 여류국수전과 2004년 여류국수전·여류명인전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참가해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2012년 여류십단전에서 우승 하는 등 총 4회 우승, 13회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