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츠화재가 전속설계사들의 수수료를 대폭 올리자 보험대리점들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메리츠타워. 일요신문DB
지난 15일 서울시청 인근에 위치한 더 플라자 호텔에는 김용범 메리츠화재 사장과 보험대리점(GA)협회 소속 사장단 12명이 모였다. GA협회 측이 최근 전속설계사 수수료를 최대 1000%까지 올리겠다고 선언한 김 사장을 상대로 계획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하는 자리였다.
김 사장은 지난 7월 초부터 지점들을 ‘초대형 점포(본부)’로 통합하는 조직개편과 함께 전속설계사 수수료를 최고 1000% 인상하는 파격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점통폐합 등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전속설계사 수수료 인상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속설계사가 GA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막아 영업 조직을 안정화하겠다는 복안이다.
문제는 이번 수수료 인상이 GA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는 점이다. GA들은 그동안 전속설계사보다 높은 수수료를 받아왔는데, 이번 인상 조치로 수수료가 오히려 역전되는 상황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전속설계사는 말 그대로 특정 보험사에 소속된 직원 형태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사무실 등 영업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지원받는다. 이런 지원에는 적잖은 비용이 드는 만큼 설계사가 받는 보험판매 수당 성격인 수수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반면 GA는 특정 보험사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보험사로부터 시설 지원 등을 거의 받지 않는다. 사무실 임대비용과 설비, 교육, 전산시스템 등은 GA가 자체적으로 마련해 운영하는데, 대신 상품을 판매한 설계사가 받는 수수료가 높다. 보험사가 절감된 지원 비용만큼을 수수료에 더 얹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GA로 옮겨가는 전속설계사들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똑같은 상품을 팔아도 수수료를 더 많이 주는 GA가 수입면에서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직업의 안정성과 회사 차원의 지원 등을 더 중요시하는 설계사들은 전속으로 남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금융권은 이번 김 사장의 파격적인 수수료 인상이 보험설계사 시장의 틀을 흔들어놓은 조치로 보고 있다. 안정성과 편의성을 택한 전속설계사와 더 많은 수입을 택한 GA로 양분된 보험설계사들의 직장 선택 기준이 모호해지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김용범 메리츠화재 사장은 GA협회 측의 수수료 인상 철회 요구 등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화재 홈페이지 캡처.
GA 사장단이 김 사장을 찾아와 담판을 지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GA들은 메리츠화재의 이번 조치로 설계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 만큼 전속설계사 수수료 인상을 철회하거나 GA들도 같은 수준으로 수수료를 올려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김 사장은 이런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전속설계사 수수료 인상은 철회할 수 없으며, 전속설계사보다 수수료가 낮은 GA들은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GA 사장단은 “GA 소속 우수 설계사를 메리츠화재로 영입하려는 것 아니냐”며 반발했다. 이에 대해 김 사장이 조직개편 배경 등을 설명하고 “전속설계사 수수료 인상 후 문제가 있으면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설득에 나섰지만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GA 소속 한 관계자는 “GA는 능력 있는 설계사가 핵심인 일종의 사람장사”라면서 “김 사장의 입장은 일단 시행한 뒤 문제가 있으면 보완하겠다는 것인데, 이미 설계사가 떠나버린 후 보완조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앞으로 메리츠화재의 보험상품은 취급하기 힘들 전망”이라며 “GA도 회사마다 입장이 있겠지만 아마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험업계는 이를 사실상 GA들의 메리츠화재 보이콧 선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GA는 기본적으로 여러 회사 상품들 중 소비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사실상 특정 상품 가입을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지급받는 수수료가 더 많을 경우 그 상품에 가입시키는 것이 GA에게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보험업계는 메리츠화재의 경우 GA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이번 갈등이 실적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메리츠화재는 현재 3400만 명 이상이 가입해 ‘국민보험’으로 불리는 실손의료보험 등에서 GA들의 공격적 영업을 통해 좋은 성적을 거둬왔다.
지난해의 경우 메리츠화재의 전속설계사 1인당 생산성은 1억 1000만 원 수준에 그친 반면, GA의 생산성은 10억 원을 훌쩍 넘었다. 설계사보다 GA의 매출이 10배가량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GA들이 메리츠화재 상품 판매를 중단한다면 최악의 경우 매출이 10분의 1로 줄어들 수도 있는 셈이다.
메리츠화재의 이러한 매출 구조가 되레 김 사장의 이번 행보를 유발한 원인일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전속설계사 조직이 작다보니 GA에 의존해야 하고, GA 의존도가 높다보니 수수료 협상 등에서 끌려다니는 악순환을 끊으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당분간은 실적 하락을 감수하더라도 전속설계사 조직의 경쟁력을 강화해 장기적으로 영업체질을 강화하려는 전략이라는 얘기다.
보험업계에서는 GA들이 실제 행동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보험사들은 물론 금융당국까지 갈수록 대형화하고 힘이 세지는 GA들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마당에 무력시위를 감행할 경우 자칫 규제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금융감독원을 통해 엄격한 감시와 규제를 받는 보험사들과 달리 GA는 아직 일종의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면서 “GA로 인한 민원이 급증하고 보험사기가 발생하는 등 부작용이 늘면서 금감원도 GA를 예의주시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실제로 금감원은 지난 6월까지 GA들의 내부통제 운영 실태를 점검하고 불완전판매 민원이 많은 상품과 관련 영업점에 대한 현장검사에 나서기도 했다.
이와 관련, 대형 GA 한 관계자는 “GA들의 속내는 다 비슷하지만 관건은 총대를 메고 나설 회사가 나오느냐 여부”라면서 “자칫 담합으로 비칠 경우 소비자 이익과 관계없는 밥그릇 다툼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부담스럽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