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탄도미사일 발사를 지켜보는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2016.7.21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 459페이지 35번, 913페이지 55번, 135페이지 86번…“
지난 7월 15일, 북한이 운영하는 대남 라디오 방송인 <평양방송>이 오전 0시 45분을 기해 정규방송을 마침과 동시에 송출한 방송 내용이다. 방송은 약 12분간 계속됐다. 이는 과거 북한이 행했던 전형적인 난수방송의 한 패턴이었다.
난수표에 상응하는 난수책을 활용한 북한의 난수방송은 과거에도 있어왔다. 과거 전향 주사파 김영환 씨 역시 민혁당 사건 당시 소설책 ‘나는 너에게 장미 정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를 난수책으로 활용한 북한의 난수방송을 통해 지령을 전달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16년 만에 정규 대남방송을 통해 난수방송을 재개한 의도와 목적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난수방송의 목적은 신분을 숨긴 채 작전지역에 침투한 공작원들에게 특정 지령을 내리기 위함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 각국의 단파 라디오 송출이 본격화되면서 라디오를 활용한 난수방송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됐다.
통일부는 20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난수 방송을 상당 기간 자제해 오다 최근 들어와서 재개된 것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의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도를 단정적으로 공개된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는 없다”고 실질적인 북한의 공작 의도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입장을 표명했다.
통일부의 브리핑 직후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북한의 공작 가능성을 높게 내다봤다. 참고로 하 의원은 국회에 등원하기 전 실제 민간 대북 단파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해 운영한 바 있는 북한 전문가이자 단파 방송 운영자 출신이기도 하다.
통일부는 20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난수방송을 재개한 북한에 대해 유감표명을 했지만, 실제 북한의 목적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했다.(사진=연합뉴스)
그러면서 하 의원은 앞서 유보적 입장을 취한 통일부에 대해 “공작원은 없고 북한의 심리전에 불과하다고 정부가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안이한 생각”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북한이 2000년 이후 난수방송을 중단한 이유는 남북관계의 화해 분위기가 컸다. 하지만 이 시기는 한국사회 내 인터넷이 보편화된 시기기도 했다. 보다 접근이 유용하고 다양한 은닉 기술을 활용 가능한 인터넷이 대체적인 지령 채널로 활용된 측면도 크다는 점이다. 다만 앞서의 하 의원은 북한의 온라인 은닉 기술 자체도 패턴이 읽힘에 따라 보안성이 취약해 졌고, 단파를 활용한 과거의 방식으로 회기 했을 가능성을 열어 둔 셈이다.
오랜 기간 북한의 단파 방송을 분석해 온 한 단파 전문가는 이러한 하 의원의 입장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전문가는 “단파는 주변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라며 “특히 북한의 송신 기술은 여전히 조악한데 반해 우리의 방해전파 기술은 발전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전문가는 “물론 여전히 한국에서도 단파 수신기만 있으면 조악하나마 북한의 대남방송을 청취할 수 있지만 난수방송을 수신하기엔 방해전파의 영향이 너무 크다”라며 “음질이 여의치 않으면 난수를 놓칠 수도 있고, 여전히 온라인을 활용한 은닉 패턴은 다양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은 난수방송 지령은 현실성이 적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실질적인 목적에 대해 이 전문가는 “북한은 2000년 이후 공식방송을 통한 난수방송을 중단했지만 때때로 군의 송출시설을 활용해 ‘난수방송’ 등을 송출한 바 있다”라며 “하지만 당시 송출은 미약한 소출력 수준이었다. 실질적인 대남 청취 목적이 아닌 전파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북한의 이번 난수방송도 본래 목적보단 한국의 사드배치 결정 이후 정치적 대응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박스] 북한이 ‘난수방송’ 송출한 ‘단파방송’이란? 단파라디오 수신기 우리가 실생활에서 흔히 듣는 FM방송은 세 종류의 주파수 대역 중 가장 적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지만 기상과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아 고음질의 청취가 가능하다. 중파 대역을 활용한 AM방송은 FM방송보다는 청취 권역을 보다 넓게 커버할 수 있지만 음질은 떨어진다. 이 때문에 국토 면적이 적은 한국에선 1990년대 이후 FM방송이 보편화되고 AM방송은 점차 쇠퇴했다. FM과 AM방송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단파방송은 다소 생소하다. 단파방송은 지구의 전리층에 여러 번 반사되어 먼 외국까지 도달 가능한 장거리 라디오방송이다. 송신소의 출력 수준과 방해 전파 및 환경(지형 및 기상)의 영향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단파라디오 수신기만 있다면 전 세계 방송의 청취가 가능하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인디펜던스데이-리써전스’에서 외계의 침공을 받은 전 세계 시민을 향해 미국 대통령이 최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단파방송이다. 먼 외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단파방송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단파방송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냉전시기를 거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세계 곳곳에선 적대국가의 비방 및 포섭을 위해 단파방송을 송출했다. 이 시기 설립된 방송국은 여전히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현재도 세계 곳곳에는 기관방송(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미국의 소리>), 국제방송(한국의 <KBS 월드>), 포교방송(가톨릭의 <바티칸 방송>) 등이 송출 중이다. [한] |
[박스] 북한이 송출 중인 대남 단파방송은 현재 ‘두 곳’ 영화 ‘이중간첩’에서 등장하는 고정간첩 윤수미(고소영 분)는 북한의 난수방송을 통해 지령을 전달받는다. (사진=‘이중간첩’ 스틸컷) 국내에서 단파방송이 생소한 이유 중 하는 이러한 남북 간의 특수한 상황 탓도 크다. 과거 국내 정보 및 수사기관에선 단파수신기를 소지하거나 이를 이용해 대남방송을 청취하는 자들을 통제하거나 처벌해 왔다. 현재는 국내에서도 단파 라디오 수신기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단순히 대남방송을 듣는다고 처벌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의 과거 탓에 대중화되지 못했다. 현재 북한에서는 두 곳에서 대남방송을 공식 송출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대남방송이 바로 이번에 난수방송을 송출한 <평양방송>이다. <평양방송>은 1967년 <조선중앙방송>에서 ‘제2방송’으로 분리된 이후 현재까지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새벽 약 30분간의 휴지기를 제외하곤 사실상 실시간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곳은 <통일의 메아리방송>이다. 조선노동당의 대남선전 외곽조직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산하 기관이 송출하는 대남방송으로 하루 세 차례 각각 2시간씩 총 6시간 방송 중이다. 방송 대부분은 조평통이 운영하는 대남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의 콘텐츠를 오디오화 한 것이다. 앞서의 <평양방송>이 반세기 가까운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채널이라면 <통일의 메아리방송>은 송출된 지 약 4년 밖에 안 된 신생 채널이라 할 수 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