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명의로 알려진 국내 대형병원의 한 의사의 대리수술이 적발돼 무기한 정직되는 일이 발생했다. 의사가 속한 병원은 국내 대형병원 톱5에 드는 삼성서울병원이다. <일요신문>은 산부인과 의사인 A 교수가 예정된 암수술에 들어가지 않고 펠로우가 대신해서 수술한 사실을 확인했다. 병원에 따르면 A 교수는 갑작스럽게 학회 일정이 잡혀서 수술에 불가피하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사와 병원은 대리수술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번뿐만 아니라 국내 대형병원에서 대리수술이 빈번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7월 8일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소속이었던 A 교수는 그날 오전 8시 난소암 수술을 비롯해 오후 1시, 3시 30분에 잡힌 자궁근종수술과 자궁적출수술 총 세 건의 수술을 집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2년차 펠로우인 B 씨가 대신해서 수술실에 들어간 사실이 확인됐다. A 교수는 당일을 포함해 지난 10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일본 학회에 참석했다. 당일 수술을 받은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측에서는 대리수술 사실을 인정했다. 병원 관계자는 “A 교수가 수술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의사가 대신해서 수술을 집도한 것은 맞다”면서 “A 교수가 갑작스럽게 지난 8일부터 학회 일정이 잡혀서 불가피하게 수술에 빠졌다고 들었다. A 교수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 환자, 보호자분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환자들의 수술도 잘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메르스 때도 병원이 어려운 입장이었는데 이번 건으로도 할 말이 없다”고 해명했다.
A 교수는 병원 내 진료와 수술뿐만 아니라 한 방송사의 메디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실력자로 출연하는 등 산부인과 의사로서 명성을 쌓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A 교수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전부터 A 교수의 대리수술 의혹은 제기돼 왔다. 지난 7월 11일에도 수술 일정이 있었지만 A 교수는 외래 진료만을 봤다는 것이다. 병원 홈페이지에서 A 교수의 11일 당시 외래진료 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병원 측에 따르면 11일에 이뤄진 수술은 오전 2건 오후 1건, 모두 3건이 계획돼 있었는데 오전에는 외래진료가 있어 시작과 끝만 들어갔고 오후 1건은 외래진료가 끝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집도했다. 그 이전에도 대리수술이 전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병원 징계위원회는 수술실로부터 사실을 인지해 내부 조사를 진행했고 결국 지난 7월 20일 A 교수의 무기정직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대신해서 수술을 한 펠로우 B 씨에 대한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대리수술을 막기 위해 수술동의서 표준약관을 개정했다. 수술 장면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음.
현행법상 대리수술에 대한 법적 처벌은 마련되지 않았다. 의료법과 보건의료법 등에 무면허에 대한 처벌사항은 명시돼 있었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대신해서 수술한 의사 역시 면허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의사의 설명의무는 보건의료기본법에도 근거 조항을 두고 있다. 보건의료기본법 12조는 모든 국민은 보건의료인으로부터 자신의 질병에 대한 치료방법, 의학적 연구 대상, 장기이식여부 등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들은 후 이에 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고 정하고 있다.
지난 2011년의 한 판례에 따르면 의료진은 환자의 증상, 진료의 내용 및 필요성, 예상되는 위험성 등을 환자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수술과 관련한 부분도 이에 포함되지만 의료법 등에 저촉되는 사항은 없어 불법의 소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대리수술의 형사처벌 가능성에 대해 여러 가지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의료 전문 법률사무소인 히포크라의 서영현 변호사는 “환자 입장에서 보면 집도의로 지정된 의사를 보고 수술하는 경우가 많다.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설명과 동의를 전제하고 수술을 하는 것인데 약속과는 달리 다른 의사가 수술을 하는 것은 의료행위에 동의가 없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며 “이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상해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수술의 목적이 병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해죄 적용에는 반론이 있다”고 말했다.
또 서 변호사는 “대리수술은 환자를 속였다는 것에 무게를 둬 사기죄의 가능성이 더 높다. 특진비가 크지 않더라도 수술비용에 해당하는 특진비를 편취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형사처벌의 가능성이 없어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0년 서울의 한 대형병원 정형외과 의사였던 유 아무개 씨가 상습사기 혐의로 피소된 적이 있었다. 환자에게는 본인이 수술을 한다고 하고 다른 의사가 수술을 했던 것이다. 유 씨는 수술 전에 지정진료행위를 하지 못하게 된 경우 환자나 보호자에게 알렸어야 했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수술 이후에도 원무과에도 환자의 수술에 관한 지정진료비가 부과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이를 알리지 않고 52명으로부터 2000만 원을 편취했다. 지난 2009년에도 한 환자가 안과에서 특진의가 아닌 전임의에게 수술을 받아 시력감소와 백내장 가속화 등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바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리수술이 쉽게 적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형병원 관계자는 “집도의가 수술방에 있는 상황에서 펠로우가 거의 모든 수술을 진행하는 경우는 많다. 이 역시 환자, 보호자와의 수술 집도 약속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지만 의료 사고가 나지 않고서는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수술방 내 수술 행위를 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내부고발 없이는 수술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사고가족연합회 관계자는 “간혹 환자들이 특진비를 더 들여 특진교수로부터 수술을 받은 뒤 대리수술이 의심돼도 근거 자료가 없어 사실관계를 따질 수가 없다고 상담을 해온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유령수술로도 불리는 대리수술을 막기 위해 지난 12일 수술동의서 표준약관을 개정했다고 밝혔다. 수술에 참여하는 의사가 변경될 경우 환자나 대리인에게 사전에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받도록 했다. 수술 중에 긴급하게 집도의나 수술 방법을 바꾸거나 수술 범위를 추가하는 경우에는 수술 후에 사유와 결과를 설명하도록 했다.
또한 병원이 수술, 시술 등 의료행위에 참여하는 의사의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하는 항목도 추가됐다. 기존 수술동의서에는 주치의 한 명의 이름만 기재됐고 주치의가 반드시 수술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항목이 없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