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세력 개편론이 노 당선자의 의중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대대적인 정치권의 인적청산과 대규모 정계개편 등 정치권의 일대 혁명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노 당선자의 주요 지지기반이 계층적으로는 20~30대, 이념적으로는 진보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방 이후 보수파가 주류를 이뤄왔던 정치권은 그 뿌리부터 재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주도세력, 메인스트림이 진보세력으로 교체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주체세력 재편론이 시작된 것은 대선 투표일 불과 3일 뒤인 지난해 12월22일 조순형 정동영 신기남 추미애 등 소위 ‘서명파’ 의원 23명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와 인적청산을 주장하면서부터다. 이같은 혁명적 주장에 대해 당 지도부와 동교동계는 당연히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에서 휴식중이던 노 당선자는 “개혁의 속도는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개혁의 흐름 자체는 누가 막고 말리고 해서 될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해 이들의 주장에 원론적으로는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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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왼쪽)는 ‘총선 전 큰 바람이 불것’ 이라는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에 따라 7일 열린 당개혁특위 워크숍에서도 ‘2단계 전대론’이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2단계 전대론’이란 노 당선자 취임전 현지도부가 조기 사퇴, 1차 전당대회를 열어 ‘과도 개혁지도부’를 구성한 뒤 이 지도부 주도로 당 개혁안을 확정하고 올 하반기쯤 2차 전당대회를 열어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것. 일견 ‘2단계 전대론’은 서명파의 초기 주장인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와 인적청산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같은 주장을 관철하는 데 있어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자는 것일 뿐 본질은 그대로 유지됨을 알 수 있다. ‘2단계 전대론’의 핵심은 현 지도부 사퇴와 ‘과도 개혁 지도부’ 구성이다. 이는 개혁의 방식과 절차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현 지도부가 아니라 ‘과도 개혁 지도부’가 쥐겠다는 것이다.
만약 과도 지도부가 민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 신당을 창당하고 그 과정에서 인적청산을 진행하는 것을 개혁안으로 확정한다면 서명파의 당초 주장이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주장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담보할 수 있다. 당초 서명파 주장은 다분히 구호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2단계 전대론’은 당의 하부구조 개편을 통한 상부구조 교체라는 혁명적 수순을 전제하고 있다. 즉 과도 개혁 지도부가 들어서면 당원과 대의원 구성을 완전히 변화시켜 기존 하부구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았던 기존 지도부는 물론 현역의원과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을 대폭 물갈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명파’는 한편으로는 ‘2단계 전대론’을 통해 자신들의 개혁론을 가다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린개혁포럼’ 결성을 통해 자신들의 개혁론을 관철시키기 위한 세 확산을 도모해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오는 16일 의원 6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개혁포럼’을 공식 발족시킬 예정이다.
이럴 경우 ‘열린개혁포럼’은 민주당 의석(1백2석) 과반을 점하는 데다 당내 최대 화두인 개혁논의의 주도권을 쥐는 등 명실상부한 당의 주체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 당선자는 서명파의 이같은 ‘정치혁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최근 노 당선자의 핵심측근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사들은 서명파가 노 당선자의 의중을 잘못 읽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문희상 의원은 9일 기자들과 만나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혁명을 하면 인적청산이고 개혁은 점진적으로 합법적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해야 한다. 이것은 당선자의 뜻과도 다르지 않다. 서명파들이 어떻게 (당선자 생각을) 읽었는지, 곡해했는지, 아니면 시켜서 했는지 모르지만 가장 좋은 것이 빨리 전당대회를 해서 지도부를 바꾸는 것이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당의 한 핵심 당직자도 “노 당선자는 최근 당 개혁과 관련, 무리하지 말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차피 취임전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없으면 시간을 갖고 하자는 것이다. 자신이 취임하기 전에 현 지도부의 사퇴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이다.”
이들의 주장처럼 노 당선자도 지구당 폐지, 원내정당화 등 다소 혁신적인 당개혁 방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수차례 피력해왔다. 지난 10일 한화갑대표와의 회동에서 한 대표가 당 개혁방안의 하나로 지구당 폐지를 들자 “원외지구당위원장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우선 문희상 의원의 발언중 “서명파들이 어떻게 읽었는지, 곡해했는지 아니면 ‘시켜서 했는지’ 모르지만”이라는 대목이다. 표면적으로는 서명파의 주장과 노 당선자의 입장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양측간 ‘짜고 치는 고스톱’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문의원 발언중 “점진적으로 합법적으로 하자”는 대목과 또 다른 당직자의 발언중 “시간을 갖고 하자”는 대목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서명파의 ‘2단계 전대론’ 주장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합법적 절차’를 통해 하부구조부터 바꾸는 완벽한 개혁을 추진하자는 것이라면 적어도 전략적으로는 노 당선자의 입장과 차이가 없는 셈이다.
결국 노 당선자는 취임전 간접적으로 피력했듯이 서명파의 민주당 개혁방향을 지지하고 있지만 현재의 정치적 입장이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어렵다는 상황 때문에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 당선자가 구상하는 민주당 개혁 나아가 정치권 개혁 구도는 무엇일까.
노 당선자는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을 점하고 있는 등 보수파들이 우리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 유지될 경우 이르면 올해부터 정치적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노 당선자로서는 올해 내에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우리사회의 의사결정 구조, 즉 주체세력을 바꾸는 것이다. 주체세력의 교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될 수 있다.
첫째는 정부조직인데 이는 대통령의 인사권을 통해 어느 정도 추진이 가능하다. 두번째는 정치권인데 이는 민주당이 도화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초기처럼 의원 빼내오기식의 인위적 정계개편은 오히려 한나라당과 영남권을 단결시켜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국민적 지지를 받는 정치개혁이란 명분을 통해 민주당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변화의 파도가 한나라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을 뿌리부터 흔들게 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다.
노 당선자가 대선 과정과 대선 이후에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민주당의 이같은 개혁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민주당의 하부구조를 개혁적인 인사로 교체해 이를 상부구조 교체로 연결시키고 마침내 정치권 체제의 변화를 도모한다는 게 개혁방향의 골격이다.
노 당선자는 대선과정에서 유시민씨 등이 이끄는 ‘개혁국민정당’과의 연대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문성근씨 등 노사모의 핵심인사들의 당개혁 논의 참여 필요성도 공공연히 언급했다. 대선 직후에는 곧바로 개혁국민정당을 방문, 당 관계자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민단체 관련 행사에 참석, 자신의 당선이 시민단체 덕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지난 11일에는 노사모와 만찬회동을 갖고 “여러분은 나와 함께 사고를 친 공범이니 앞으로도 공범으로서 그 책임을 같이 나눠야 할 것”이라며 계속적인 지지를 당부했다.
노 당선자가 인수위를 통해 보여주는 ‘국민제안제’ 등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문희상 의원은 위의 발언을 한 같은 자리에서 “개인 생각이지만 헤쳐모여 식의 자연적 정계개편은 막을 길이 없다. 총선 전에 큰 바람과 격랑이 예상된다”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한 발언이다.
본인은 발언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정치상황 분석과 전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 의원의 발언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함께 최근 민주당내 관망파로 분류되던 상당수 의원들이 개혁파임을 자임하거나 속속 ‘열린개혁포럼’에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도 노 당선자의 개혁구상을 읽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