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UN 사무총장이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서신을 보내기 위해 이용한 외교행낭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5월 28일 반 총장이 서울 신당동 JP 자택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모습. 연합뉴스
“비밀 얘기만 했어. 내가 얘기할 것은 그것뿐이야.” 지난 5월 28일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만난 뒤 JP는 이같이 말했다. 반 총장은 “인사차 들렀다”고 했지만 만남이 끝난 뒤 JP는 “얘기하면 안 돼. 둘이 얘기한 걸 말하면 세상에 다 알려지잖아”라고 밝혔다. 여의도 정치권은 둘의 만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반기문 대망론’이 ‘충청권의 맹주’와 결합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JP는 최근 반 총장의 친필 편지를 받았다. JP와 함께 찍은 사진 2장을 동봉한 반 총장은 “지난 방문 때 너무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하다. 내년 1월에 귀국하면 찾아뵙겠다. 지금처럼 지도 편달 부탁드린다”고 적은 것으로 전해진다. 첫 번째 만남의 대화 내용이 비공개였던 것처럼 JP는 이번에도 편지를 비밀에 부쳤다.
이에 대해 반 총장 최측근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편지 하나로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다. 반 총장은 영악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반 총장이 비밀을 유지할 것이 뭐가 있나. 반 총장은 수나 끼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의례적으로 보낸 편지인데 이쪽저쪽에서 난리다. 반 총장에게도 책임이 있다. 본인이 언론 노출을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편지 하나에도 시선이 쏠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 총장이 JP에게 안부 편지를 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세간의 관심은 ‘외교행낭(pouch)’을 향하고 있다. 반 총장은 공적 외교 통신 수단인 외교행낭으로 JP에게 편지를 전했다. 외교행낭은 본국 정부와 재외공관이 문서를 주고받기 위한 가방이다. 대사관이 암호장치와 납봉을 한 뒤 발송하지만 국제법에 따라 통관절차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다. 행낭 안 내용물에 대해선 재외공관 주재국 정부나 제3국이 열어볼 수 없다. 비엔나 협약 제27조 3항에 의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국이 열어보거나 유치할 수 없다. 일반화물과 함께 민간여객기나 수송기를 통해 운송된다.
인천공항공사 관계자는 “대사관에서 외교부에 문서로 신청하면 외교부가 다시 국토교통부로 넘긴다. 국토부가 외교행낭을 심의하고 공항으로 통보하면 승인된 문서를 가지고 우리는 현장에서 국토부 요건과 맞는지 확인을 한 뒤 보안 검색을 면제해왔다. 물론 외교행낭은 X검사와 세관 절차도 거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외교행낭은 비엔나 협약이 근거다. 다른 국가들도 서로 보안 검색을 면제를 해주고 있다. 상호주의에 따라 다른 나라들도 우리나라가 외국공관에 요청하면 외교행낭에 대한 보안 검색 면제를 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외교행낭에 대한 법적 근거는 항공보안법이다. 항공보안법 시행령 제13조는 “외교행낭은 외교신서사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공문서와 외교행낭의 수를 표시한 공문서를 소지한 사람과 함께 운송돼야 한다. 외교행낭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와 국가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15조는 “외교행낭에 불법 방해행위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또는 폭발물 등 위험성이 있는 물건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국가 공관의 증명서를 국토부 장관이 인증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보안 검색을 면제 받는 외교행낭은 초고속으로 운송 가능한 외교관들의 ‘특급 우편’인 셈이다. 반 총장은 JP 자택으로 국제우편을 보낼 수 있었지만 철저한 보안 유지가 가능한 외교행낭을 선택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외교신서사’다. 항공보안법상 외교행낭은 외교신서사의 동행 없이 운송될 수 없다. 앞서의 국토부 관계자는 “외교신서사는 행낭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행낭을 주고받을 한 사람이 꼭 동행하도록 돼있다. 행낭만 보내면 절대 안 된다. 물건만 부칠 수 없다. 뉴욕 UN 본부에서 보낸 것이면 UN 직원이 행낭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반 총장은 안부 편지를 보내기 위해 UN 직원까지 동행시킨 셈이다.
외교부는 “국제기구 수장이나 정상급 인사들이 방문국 면담인사에게 감사 서한을 보내는 것은 국제적 관례다. 서한이 통상 외교행낭으로 전달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외교행낭은 긴급하게 기밀문서를 국가간에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공적인 수단이다. 2008년 11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결재한 서류를 외교행낭에 담아 정부 측에 전달했다. 당시 대한항공은 예금자보호법시행령 등 시급히 통과를 요하는 민생법안 관련 문서를 약 40시간 만에 정부로 이송했다.
하지만 반 총장이 외교행낭을 사적으로 사용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관례’라는 반 총장 측 입장과는 달리 외교부 훈령도 “외교행낭은 공용에 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재외공무원 복무규정(대통령령)에도 “재외공무원은 특정인 또는 특정단체의 사적이익을 위해 업무를 수행해선 안 된다”고 쓰여 있다. 서울지방항공청 관계자는 “외교행낭 건수 자체가 드물다”고 말했다.
여의도 정치권이 ‘외교행낭’을 주목하고 있는 까닭이다. 외교행낭 특성상 기밀문서도 아닌 편지를 반 총장이 JP에게 보냈을 리 없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정치권 일각에선 “반 총장이 JP에게 정치적 지원을 요청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뭔가 은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외교행낭을 택했을 것이란 얘기다.
앞서의 반 총장 최측근은 “반 총장이 JP에게 기대는 것은 대선 전략상 도움이 된다. 지난 총선 때 JP가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위해 부여에서 손을 들어주자 부여가 몰표를 던졌다. 여전히 JP는 건재하다. JP가 반 총장에게 ‘플러스’ 요인이지 절대 마이너스 요인은 아니다. 충청도에서 정치하는 사람은 JP와 연결되면 무조건 이득을 본다. 대전은 야당이 많기 때문에 JP의 영향력은 좀 약하겠지만 충청도에서 JP 입김은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외교행낭을 두고 다양한 해석도 나오고 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을 중심으로 반기문 대망론을 띄우려고 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반 총장이 방한했을 때 대선 주자로 입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일부 국민들은 대통령 자격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JP를 향한 편지는 자신의 대선 출마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고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키겠다는 의미다. JP를 내세워 반 총장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충청대망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고 주장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