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30일 연세대 대우관에서는 ‘연세대 상경대학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 정갑영 연세대 총장. 사진은 연세대 공식블로그 캡쳐.
이날 참석자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은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경제 75·현 의원)였다. ‘친박 실세’로 통하는 그는 정부 인사에 관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당시 국가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한국은행의 수장이 모두 연세대 상경 출신이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경영 70)는 연세대 특임교수를 거쳐 2014년 4월 한국은행으로 복귀했다.
지난 이명박정부의 ‘고려대 인맥’만큼 이번 박근혜정부의 ‘연세대 인맥’은 정·재계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해오고 있다. 특히 최경환 의원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과 출신들은 미국 위스콘신 대학 출신들과 함께 정부의 요직을 꿰찼다. 최경환 의원은 위스콘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승환 전 국토교통부 장관(경제 75),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경제 76)은 연대 경제학과 출신이며 위스콘신 출신으로는 강석훈 청와대 경제수석,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전 경제수석) 등이 거론된다. 여권 한 관계자는 “그간 (경제) 관련 부처는 ‘최’가 장악해왔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경제자문회의’라는 상임기구를 두고 있다. 국민경제자문회의는 경기 활성화 등을 명목으로 정부의 정책 방향을 논의해 온 숨은 ‘컨트롤타워’다. 최경환 의원은 경제부총리 시절 이 기구의 당연직 위원을 지냈다. 당연직 위원 5명 가운데는 청와대 경제수석,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 4개 분과로 구성된 국민경제자문회의의 핵심 멤버 가운데 한 명은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경제 71)이다. 그는 박근혜정부에서 2013~2015년까지 거시금융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뒤를 이어 올 초에는 손양훈 인천대 교수(경제 78)가 혁신경제분과 위원장에 발탁됐다. 위원장급 가운데 고대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연대 상경 출신 그룹은 정권 초기부터 현재까지 국가 경제 운영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거둔 ‘성적표’는 평균 이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연간 경제성장률은 2013년 2.9%, 2014년 3.3%, 2015년 2.6%로 정부 공약 수준(4%)에 미달했다.
가계 부채는 지난 2009년 750조 원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 1200조 원을 넘었다. 사진 통계청
또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민 1인당 실질소득(처분 가능 소득)은 1599만 원으로 전년 대비 4% 증가했지만 전체 국민의 46.3%는 현재 소득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때문에 1인당 실질소비지출은 매년 1%대 증가에 그치고 있다. OECD 평균 지출액을 100으로 환산했을 때 한국의 소비지출은 71.7로 일본(94.3), 영국(105.6), 미국(154.4)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소비심리를 위축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경제연구원(KERI)은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6%에서 2.3%로 0.3%포인트 낮췄다. 역대 최저 수준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 6월 11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지만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2.7% 감소했으며, 수입 역시 7.7%가 감소했다. 이대환 유통금융연구소장은 “표면적으로는 흑자지만 수입이 감소했다는 것은 내수 부진을 뜻하고, 수출 감소는 세계 경기의 불황을 가리킨다”며 “디플레이션 우려 속에 국내 경기 사이클이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 부채 또한 매년 증가세를 기록 중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중앙정부의 재무제표상 부채는 2014년 1213조 원에서 2015년 1285조 원으로 늘었다. 가계 부채도 2012년 963조 원에서 지난해 1203조 원까지 급등했다. 전문가들은 ‘초이 노믹스’로 대변되는 ▲금리 인하 ▲부동산 정책(LTV·DTI 완화) ▲100조 원 규모의 확대 재정 편성 등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재정 건전성 악화와 경기 침체의 책임을 특정 대학 출신들에게만 돌리긴 어렵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최경환 의원의 입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경환 경제팀’이 매번 공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예는 분식회계를 저지른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 2000억 원대 국고 지원이다.
최경환 의원과 임종룡 위원장, 안종범 수석 등은 이른바 ‘서별관 회의’에서 대우조선에 대한 추가 금융 지원을 결의한 뒤 대주주인 산업은행을 압박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의혹을 폭로한 홍기택 전 산업은행장은 자회사를 부실 관리한 혐의(배임 등)로 최경환 의원 등과 함께 검찰에 고발됐다.
국회가 받은 서별관 회의 문건을 보면 ‘검찰이 남상태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경제 71)에 대한 배임 혐의를 조사 중’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그러나 남상태 전 사장에 대한 수사 착수는 서별관 회의 후 반 년이 넘어서야 이뤄졌다. 사정기관 안팎에선 남상태 전 사장의 ‘동문’이 힘을 쓴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이 과정에 한 여당 국회의원이 ‘다리’를 놔줬다는 소문이 더해졌다. 이 여당 의원은 “남 전 사장과 가족이긴 하지만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소문을 일축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사진)은 지난달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가계부채TF 현황 및 정부대책 보고에 참석했다. 사진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현 정부 들어 대우조선의 사외이사로 내정된 임원 가운데는 연대·위스콘신 출신이 있다. 금융위원회는 산업은행을 통해 대우조선 임원 인사에 관여해 왔다. 위스콘신 대학 동문회 부회장인 조전혁 전 새누리당 의원과 연세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신광식 한국개발연구원 초빙위원(경제 72)은 각각 2013~2015년 회사 감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에게 대우조선 부실 감사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하지만 대우조선 감사위원을 역임한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은 “수년간 곪아왔던 부실이 유가 하락 등 세계 경기 흐름과 맞물려 터진 것”이라며 “사외이사들이 ‘친박’과 권력형 비리를 공모했다고 보긴 어렵다. 남상태 전 사장의 경영 판단 미스가 부실의 주 원인“이라고 말했다.
‘판단 미스’로 국민 경제에 타격을 준 또 다른 인물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경제 76)이다. 문 이사장은 지난해 메르스 사태 당시 초기 대응 실패로 책임론이 대두되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같은 해 ‘노른자’ 기관장으로 복귀하며 ‘친박 낙하산’ 의혹을 받았다. 문 이사장은 국민경제자문회의 민생경제분과 자문위원 출신이기도 하다.
KERI는 지난해 6월 보고서를 통해 “메르스 사태가 1개월 간(6월 말) 지속될 경우 GDP의 0.26% 감소하고 손실 규모는 약 4조 원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정부 역시 4조 원 규모의 경제적 손실을 인정했지만 문 이사장에 대한 법적 책임은 묻지 않았다.
재계에서는 연대 총동문회장인 박삼구 회장과 연대가 장악한 금융권 간의 ‘밀월’ 의혹이 제기된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금호산업을 되찾은 것이다.
앞서 지난해 7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주도한 금호산업 채권단은 박삼구 회장에게 금호산업 지분 인수가로 1조 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박삼구 회장은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고, 언론에서는 경영권 회복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잇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곧 ‘기우’로 드러났다. 채권단이 제시한 희망 인수가는 한 달도 못가 1조 원에서 7000억 원대까지 내려왔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원금 손실에 대한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인했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재계 관계자는 “박삼구 회장이 채권단 미팅 때 자신이 임원으로 영입한 재경부 출신 전직 고위 관료를 대동해 공직 생활 후배였던 은행장을 고개 숙이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만약 박삼구 회장이 (인수가가 높다고) 하소연했다면 금융권에서 부탁을 들어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연대 출신 관료들과) 교류는 있겠지만 나머지는 알 수 있거나 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경배 회장은 ‘초이 노믹스’의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기업가로 꼽힌다. 최경환 경제팀은 기업이 사내 유보금에 대한 투자행위(현금배당 포함)를 할 때 세금을 감면해주는 기업소득 환류세제를 운영했다. 기업 투자 활성화 명목으로 도입된 이 제도는 재벌 총수의 재산 증식에 악용된다는 비판과 함께 국회에서 폐지가 논의 중이다.
실제 대부분 대기업은 이 제도를 활용해 적극적인 배당에 나섰다. 보유 지분이 많은 총수일수록 더 많은 현금을 챙겨가기가 용이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주식 부호 1~2위를 다퉜던 서경배 회장은 지난해 아모레퍼시픽그룹, 아모레퍼시픽 배당으로 현금 258억 원을 챙겼다. 딸 서민정 씨 등 특수관계인(법인 제외)의 배당금까지 더하면 총 배당금은 292억 원으로 늘어난다.
여권 다른 관계자는 “‘최’가 주축이 된 권력자들이 티가 나게 (특혜 등을) 주고 받거나 증거를 남기진 않았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교피아’들의 전횡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