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내정자는 여권 내에서 알아주는 이론가이자 전략가이다. 오죽하면 ‘외모는 장비지만 속은 조조’라는 소리를 들을까. 특히 그의 정계개편론은 변혁적 성격이 강하다. 그가 지난 98년 김대중 정권의 초대 정무수석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부터 2000년 4월 15대 총선 전까지 집요하게 설파했던 것이기도 하다.
토네이도는 미국 대륙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다. 당시 문 수석은 98년 5월18일 전격 경질돼 이강래 국정원 기조실장과 자리바꿈을 할 때까지 김대중 대통령을 대상으로 토네이도론을 실천에 옮기자고 집요하게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네이도론은 크게 봐서 이념적 성향에 따른 정당구도 대개편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98년에도 여당인 국민회의와 야당인 한나라당은 ‘색동저고리’ 정당이었다. 민주화 세력과 개발독재 세력이 양당에 뒤엉켜 있었다.
특히 한나라당은 그 정도가 심했다. YS 민주계와 구 민정계 의원들이 양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국민회의가 국회 등에서 제 역할을 하려면 ‘다수의석’ 확보가 불가피했고 이를 위한 이념중심의 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게 토네이도론의 출발점이다.
▲ 문희상 의원이 최근 ‘헤쳐모여식 정계개편’을 언급함에 따라 그가 98년 추진했던 ‘토네이도론’ 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문희상 의원은 지난 8일 새 정부의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내정 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더욱이 초유의 경제위기로 인해 명분만 제대로 갖추면 김 대통령은 어떤 일도 밀어붙일 수 있는 게 DJ정권 초반의 상황이었다. 문 수석은 당시 이 같은 점을 강조하면서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정계개편을 역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문 수석의 최대 적수는 청와대내에 있었다.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문 수석과는 달리 ‘개별의원 영입’을 주장했었다. 문 수석은 당시 그것을 ‘낚시론’이라고 칭하곤 했다. 명분과 이념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 정치판 자체를 밑바닥부터 뒤엎는 게 토네이도론이라면 김 실장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낚듯이 의원들을 한 명씩 영입하자고 주장했다.
국민회의 상당수 인사들은 문 수석의 이론을 선호했었다. 정치권의 변혁이라는 명분과 다수의석 확보라는 실리를 한꺼번에 챙길 수 있는 게 토네이도론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김 실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까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김 대통령의 논리적인 성품, 그래서 다소 ‘소심한’ 스타일이 문 수석의 ‘그랜드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 추측이다. 김 대통령은 98년 5월10일 처음으로 가진 ‘국민과의 대화’에서 의원 영입 의사를 공개 천명한다.
김 대통령은 이날 “국민 여론에 따라 여당을 다수로 만드는 노력을 안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씀드리고 국민 여러분의 성원을 바란다. 국민 여론은 야당을 빼내더라도 정계개편을 해 정국을 빨리 안정시키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이 즉각 반발하고 비판여론도 일었지만 의원영입,즉 ‘낚시론’은 이때부터 실행단계에 들어간다. 반면 문 수석은 그로부터 8일 후인 98년 5월18일 청와대에서 밀려나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전직한다.
문 수석의 경질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힌다. 토네이도론을 주장하면서 여러 곳에서 김중권 실장과 부딪쳐온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김 대통령이 당초 이강래씨를 정무수석으로 임명하려했으나 동교동계의 반대로 인해 문 수석을 기용했다가 결국 이강래씨를 불러들였다는 후문도 있었다.
그러나 문 수석이 김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는 과정에서 오버액션을 한 탓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왔었다. 문 수석은 5월10일 국민과의 대화가 끝난 직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 대통령을 찾아가 “국민과의 대화는 잘 됐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국정의 전반만 얘기하시는 게 바람직한데 너무 세세한 곳까지 말씀하신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라는 요지의 건의를 했다고 한다.
이에 김 대통령은 “당신들이 제대로 하면 내가 그러겠나”라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 수석은 한 걸음 더 나가 “각하 그렇게 계속하시면 YS와 비슷해집니다”라고 ‘충언’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날 문 수석이 DJ의 심기를 건드린 게 그동안 누적된 요인과 함께 폭발해 경질사태를 빚었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어쨌든 문 수석 경질 이후 국민회의는 대대적인 의원 영입에 나서서 상당한 수확을 거둔다. 99년 초 한나라당 이규정 의원이 국민회의에 입당함으로써 국민회의는 집권 초기 79석에 비해 24석이 늘어난 1백3석을 기록하게 된다.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 52석을 합치면 과반 의석에서 5석을 넘긴 1백55석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추가영입을 시도했다. 최소 1백60석을 넘겨서 공동여당이 국회의 16개 상임위마저 장악하겠다는 계산법이었다. ‘낚시론’이 계속 추진된다는 얘기였다. 문 내정자는 이 같은 상황이었던 99년 상반기에 또 한 차례 김 대통령에게 ‘토네이도론’을 건의하는 ‘극비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8년 초 정계개편론이 동교동계와 민주계의 연합에 초점을 맞춘 ‘신민주대연합론’이었던 데 비해 그 보고서는 그 폭이 좀 더 넓어진다. 즉 아예 국민회의를 해체하고 민주•개혁세력을 중심으로 온건진보세력과 민주 보수세력, 신지식인형 테크노크라트와 전문가집단 등까지 망라하는 신당 창당을 하자는 것이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물론 한나라당 내 수도권의 민주•보수세력이 개별 참여하는 게 원칙이지만 자민련 내 급진적 내각제파와 한나라당 내 일부 구주류 보스들은 가급적 배제하자는 구체적 의견까지 제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보고서는 총재 휘하에 9개 권역별 대표제를 도입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지도체제와 유럽식 ‘제3의 길’인 신중도노선을 정치이념으로 각각 제안했다. 신당 창당의 시기는 9월 정기국회 이전으로 잡았었다. 문 내정자의 이 같은 제 2차 ‘토네이도론’ 실천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김 대통령이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내정자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토네이도론을 꺼내든 것은 이념적 성향에 따른 정치구도의 대변혁을 통해 지역대결구도를 해소하지 않는 한 총선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총선 투표함을 열어보니 역시 민주당이 패배하고 한나라당이 거대야당으로 다시 부상하는 결과가 나왔었다. 김재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