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권에서 은행과 증권사는 마치 ‘톰과 제리’처럼 틈만 나면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다. 서민들이 재테크 수단으로 적금이냐 주식이냐를 놓고 고민할수록 두 업계는 손님 끌기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밥그릇이 걸린 문제다 보니 두 업계는 올해도 어김없이 연초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은행과 증권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은행연합회와 금융투자협회 두 수장이 선봉에서 싸움을 독려했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이다. 하 회장은 지난 2월 ‘만능통장’으로 불리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출시를 앞두고 “은행에도 투자일임업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 회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투자일임’이란 금융회사가 고객이 맡긴 돈으로 주식종목 등을 골라주는 투자 형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고객의 돈을 금융사가 알아서 굴려주는 방식인데, 주로 증권사에서 이런 방식으로 고객 자산을 관리해주고 있다.
수십 년간 증권사의 텃밭으로 인정해왔던 시장에 은행이 발을 들여놓겠다고 나서자 증권업계는 발끈했다. 하 회장에 맞대응하기 위해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나섰다. 황 회장은 즉시 기자간담회를 자청하고 “은행에 일임업을 허용하는 것은 금융투자업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자 국가 전체 금융시스템에 부담을 주는 일”이라면서 “은행은 운용 전문가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투자상품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손실이 났을 때 고객의 민원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하 회장을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투자일임업은 금융투자업계에 한해야 한다”고 방어막을 쳤다.
그러나 양측의 날카로운 대립은 불과 열흘 만에 하 회장의 판정승으로 허무하게 끝났다. 어찌된 일인지 황 회장은 2월 중순 다시 한 번 기자회견을 자청한 뒤 “국민 재산 늘리기라는 ISA제도의 취지를 고려해 대승적 차원에서 투자일임업을 ISA에 한해 은행에 허용하기로 했다”며 입장을 바꿨다.
선봉장으로 나갔던 황 회장이 갑자기 물러서자 증권사들이 크게 반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증권업계에서는 “검투사(황 회장의 별명)라더니 알고 보니 껌투사 아니냐”거나 “있는 밥그릇도 못 챙길 거면서 왜 앞에 나섰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체면을 구긴 지 5개월여 만인 지난 7월 중순, 이번에는 황 회장이 칼을 뽑아 은행업계를 겨누고 나섰다. 황 회장은 지난 7월 12일 열린 금융투자협회 하계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증권업계에서 해결돼야 할 선결과제는 법인지급결제 허용”이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이미 지난 2007년 국회에서 개인과 법인 모두에 대한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를 순차적으로 허용해주기로 하는 조건을 달아서 법안이 통과됐다”면서 “이를 위해 지급결제망 이용비 3375억 원을 냈지만 여전히 증권사는 법인에 대한 지급결제 업무를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법인지급결제란 각종 대금 결제와 급여 이체 등 기업 자금을 결제하는 업무로 은행에만 이 업무가 허용돼 있다. 황 회장이 이 업무에 대해 총대를 멘 이유는 무엇보다 직장인들의 급여통장을 빼앗아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은 지금도 자신의 거래은행뿐 아니라 증권사 계좌를 통해서도 급여이체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통장으로 급여가 들어가기까지 ‘주거래은행’을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A 사에 근무하는 홍길동 씨가 자신의 증권계좌로 급여를 받을 경우 A 사는 일단 홍 씨를 포함한 모든 직원의 급여를 주거래은행인 B 은행으로 보낸다. 이후 B 은행이 A 사 직원 개개인의 급여계좌별 코드를 일일이 입력하고 급여를 송금하면 비로소 홍 씨의 계좌에 급여가 들어간다. 급여뿐 아니라 기업이 협력업체 등에 대금을 지급하는 일도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결국 어떤 통장으로 월급이나 대금을 받더라도 최소한 한 번은 회사의 ‘주거래은행’을 거쳐야 하는 구조인데, 증권업계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수많은 회사의 주거래은행, 즉 법인지급결제 기능인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은행망을 이용해 이뤄진 하루 평균 결제금액은 43조 3920억 원에 달하고, 이 가운데 법인들의 지급결제액만 하루 35조 원에 이른다. 은행들은 이런 막대한 법인지급결제를 통해 연간 7조 원에 달하는 각종 수수료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증권사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규모다.
하지만 은행이 사실상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는 법인지급결제시장을 내놓을 리 만무하다. 은행들은 지난 2월 ISA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을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은행연합회는 “황 회장이 통과됐다고 주장하는 법안은 증권사가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결제서비스만 허용하는 것으로 돼 있다”며 반박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국회 재경위 회의록을 보면 증권사는 개인고객에 한해 결제서비스를 허용하고 법인고객에 대해서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융결제원 규약에 명시하도록 한 내용이 있다”면서 “황 회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은행권이 지난 2월 증권사들을 공격할 당시 황 회장이 방어수단으로 내세웠던 ‘전업주의 원칙’을 이번에는 자신들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연합회 측은 “증권사에 법인지급결제를 허용하면 금융산업의 큰 틀인 전업주의 원칙을 훼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은행에 투자일임업을 허용하는 것은 금융투자업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라던 황 회장의 발언을 주어만 바꿔서 역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권의 관심을 집중시킨 두 사람의 재대결은 결국 8월 초 금융당국이 발표한 초대형 IB(투자은행) 육성방안에 증권사의 법인지급결제 기능이 빠지면서 또 한 번 하 회장의 승리로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일 ‘초대형 IB 육성을 위한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법인지급결제 허용방안을 제외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법인지급결제 허용 문제는 초대형 IB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면서 “개인지급결제 등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증권사와 연관된 문제기 때문에 이번 방안과 별개로 추진해야 할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증권사들이 선별적 허용방안에 동의하면 초대형 IB에 먼저 법인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하는 것은 검토해볼 수 있다”며 한 가닥 가능성을 남겨뒀다.
하지만 금융권 관계자들은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법인지급결제를 위한 시스템을 운영하는 금융결제원 내부규정은 현재 증권사 지급결제 범위를 ‘개인’으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증권사들이 법인 자금을 지급하려면 이를 개정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은행을 필두로 시중은행들이 금융결제원의 이사진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은행권이 통 큰 양보를 하거나 ‘윗선’에서 교통정리가 이뤄지지 않는 한 규정 개정은 요원한 셈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황 회장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하 회장은 금융권은 물론 정·관계까지 마당발로 소문난 사람”이라면서 “황 회장의 2연패”라고 잘라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