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박사는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26년 종로2가 덕원빌딩에 유한양행 설립했다. 출처=유일한 박사 온라인기념관
유일한과 유명한의 일생은 완벽한 대척점이다. 유일한은 1895년 평양 재력가 유기연의 장남으로 태어나 1904년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일한은 당시 유한양행을 통해 의약품 생산 외에도 위생용품 수입 등을 통해 국민 생활 향상에 일조하고 화문석 등을 수출해 민족자본 형성에도 힘썼다.
1938년 사업 활성화를 위해 다시 미국으로 출국한 유일한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돼 임시정부 후원 등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입국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유일한은 1942년 재미 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를 대신해 유한양행을 이끈 인물이 바로 동생 유명한이다.
유명한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등에 따르면 유명한은 1941년 8월 경성부에 있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해 국방헌금 1만 원을 일본 제국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헌납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때인 1941년 12월 유명한과 유한양행은 전투기 제작비로 자신과 회사 명의로 5만 3000원을 종로경찰서를 통해 일본군에 헌납했다. 각각 유한양행 명의로 2만 7000원, 유명한 본인 명의 1만 원, 만주유한공사 명의로 1만 원, 유한무역주식회사 5000원, 직원 명의 1000원이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는 건 무리가 있으나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12~15원이었고 1000원이면 기와집 한 채도 거뜬히 살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유한양행의 전투기 헌납(유한양행서 애국기)을 보도한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자 보도. 출처=미디어가온
더욱이 당시 조선 최고 재벌이었던 화신의 사주 박흥식이 전투기 제작비용으로 헌납한 금액이 3만 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한양행과 유명한의 헌납 금액은 천문학적임에 틀림없다. 유명한 시절 유한양행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왕의 군대인 황군에 대해 ‘皇軍武運長久(황군무운장구)’를 쓴 광고를 하기까지 했다.
유일한과 삼형제의 막내 유특한(유유제약 창업주)은 친일행각을 한 유명한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의절했다. 이때 유일한 박사가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놈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놈은 모른다”다.
유명한은 해방 직후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로부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유명한은 1945년 10월 26일에는 조선약품공업협회의 사무부 위원으로, 1948년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일한과 유특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친일을 이유로 거절당하고 같은 해 전쟁 중에 사망했다.
유한양행은 이러한 유명한 시절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유한 50년사>나 유한양행·유한재단 홈페이지에 유명한 시절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당사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창업주 때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고 있고 유일한 박사 유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며 “유명한 전 사장도 그 경영인 중에 한 명일 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기업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유명한 사장의 결정으로 보인다. 그래도 유명한 전 사장 시절에 대해선 절대 미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50년사를 발간했을 당시 임직원들이 현재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있어 유명한 사장시절 기업사를 그렇게 기술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유명한 전 사장 시절 친일행각에 대해선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이후에 알았다”며 “기업 역사에는 밝음이 있다면 어두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두운 역사를 다 알리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후에 있을 100년사 발간에서 유명한 사장 시절을 자세히 기술할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어떠한 입장도 내놓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장익창 비즈한국 기자 sanbada@bizhankook.com
두산·삼양 창업자, 현대 현정은 조부 ‘친일멍에’ 일제 강점기 시대 친일 기업인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두산 창업주 박승직, 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 아버지이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조부인 호남 갑부 현준호 등이다. <친일인명사전> 등에 따르면 박승직은 친일단체 설립과 활동을 주도했다. 박승직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자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 1938년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이기도 했다. 박승직이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다. 1941년에는 사명도 ‘미키상사’로 바꿨다. 두산 창업주 일가 3대.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승직, 박용곤, 박두병. 출처=두산 두산은 1996년 창립 100주년 기업사에서 박승직의 친일행각을 일절 기록하지 않았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그러한 내용을 기업사에 적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밝혔다. 김연수는 경성방직, 삼양사, 해동은행 등을 경영했고 만주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받았다. 1937년부터 군수 산업에 뛰어들더니 1944년 전쟁 지원을 위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김연수는 해방 후 친일파로 지목돼 조사받았으나 반민특위 재판에서 풀려났다. 김연수는 재판과정에서 죄를 시인하고 속죄했다. 삼양그룹 관계자는 “일제의 강압에 대항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삼양사는 1939년 한국 최초 장학재단인 양영재단을 설립해 민족 교육에도 앞장섰다”고 말했다. 왼쪽은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출처=삼양그룹), 오른쪽은 현준호. 현준호는 1920년 호남은행을 설립했으며, 아버지 현기봉과 함께 친일 인물로 빠짐없이 거론된다. 현준호는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면서 한때 몸담던 민족주의 진영과 결별했다. 그는 1938년 조선총독부 산하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했고 해방 때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활동에 가담했다. 현준호는 반민특위 해체로 처벌받지 않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친일행위 평가는 당대로 한정돼야 한다. 호남은행은 일본인에게 융자를 안 해 강제 합병되기도 했다. 현준호는 막후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