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연예인보다 대표이사의 커리어 쌓기에 더 집중한 듯한 연예기획사가 있다. 그러다 보니 사회봉사, 환경 보호 활동 등에 앞장섰던 연예기획사 대표 이 아무개 씨(38)는 소속 아이돌보다 더 많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해 한 시상식에서 그가 대통령상에 해당하는 ‘대상’을 수상했다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친환경 엔터테인먼트’ ‘봉사에 앞장 서는 연예계 인사’ 등으로 알려진 이 씨가 이번엔 전혀 다른 의미로 언론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 내용은 바로 연예기획사 소속 여자 연습생에 대한 성추행, 성 로비 강요 등이다.
영화 ‘노리개’의 한 장면.
지난 6일 서울남부지검 형사2부(부장검사 고민석)는 자신의 기획사 소속 연습생에게 옷을 벗을 것을 강요했다는 혐의로 이 씨를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지난 4월 7일 피해자인 A 씨(여·20)에게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 너는 멘탈(정신)이 부족하다. 남들 앞에서 옷도 벗을 줄 알고 성 로비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50분 동안 옷을 벗을 것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의 눈앞에서 먼저 옷을 벗으며 ‘본보기’를 보여준 이 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의 멤버 신 아무개 씨(여·27)는 방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문제의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사건은 기획사 사무실이 아닌 신 씨가 속한 걸그룹 숙소에서 벌어졌다. 이날은 A 씨를 이 기획사의 유일한 걸그룹의 새로운 멤버로 영입하는 정식 계약을 체결하는 날이었다. 이 걸그룹은 몇 년 전에 데뷔했지만 큰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연예계 활동도 그리 활발하진 않았다.
사건 당일 숙소에는 대표인 이 씨와 신 씨, 걸그룹의 또 다른 멤버 C 씨, 그리고 피해자 A 씨 등이 함께 있었다. 이번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진 멤버 C 씨는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이 벌어진 방 안에는 이 씨와 신 씨, 피해자 A 씨뿐이었다는 것. 그곳에서 이 씨에게 50여 분 간 옷을 벗을 것을 강요당했다는 A 씨는 그 직후 바로 남자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당시의 상황을 알렸다. 서울의 한 보컬학원을 다니던 남자친구는 이를 학원 측에 알렸고, 학원 관계자들이 그 사실을 A 씨의 부모에게 전달했다. A 씨와 그의 부모는 결국 이 씨와 신 씨를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연예기획사 대표 이 씨는 2011년부터 아이돌, 개그맨, 뮤지컬 배우 등이 소속된 연예기획사를 설립해 운영해 왔다. 다수의 연예관계자들에게 문의해봤지만 이 씨나 그가 운영하는 연예기획사, 그리고 그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스타급 연예인은커녕 경영진조차도 연예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소형 연예기획사로 보인다.
연예기획사의 주된 활동은 연예인 매니지먼트였지만 이와 함께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면서 스포츠 동호회, 환경보호, 소외계층 봉사활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이 씨는 이런 다양한 활동을 내세워 지난해 각 정부부처가 후원하는 한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해당 시상식에는 대통령상, 국회의장상, 국무총리상, 장관상 등 정부포상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이 씨의 수상 소식은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됐는데 기사에는 그가 어느 부문에서 상을 받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대상’을 받았다고만 적혀 있다. 대상이라면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이 씨는 국내 몇몇 예술 전문 대학교와 직접 산학협력 MOU를 체결했다. 엔터테인먼트 관련 부문이 특화돼 있는 대학들과 MOU를 맺어 이 대학 학생들이 이 씨의 연예기획사에서 오디션을 보고 연습생으로 발탁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씨가 연예계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외부에서 봤을 때에는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고 대학교와의 MOU 체결을 통해 입지를 넓혀 사회적으로는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비춰질 수 있다.
이처럼 이 씨의 행적과 경력은 소속 연예인이 아니라 대표이사인 자신이 부각됐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연예기획사, 특히 소형 기획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런 경력을 채우기 위해 이 씨가 소속 연예인을 활용해 실제로 성 로비를 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특히 대통령상을 수상했다는 부분에서, 스타급 유명 연예인이 한 명도 소속되지 않은 소형 연예기획사 대표가 고작 2년여의 사회봉사와 환경 보호 활동으로 큰 상을 수상했다는 점은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로비가 있었던 게 아닌지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시상식 조직위원회 측은 당혹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씨가 받은 상은 이 시상식에서 수여되는 170여 개에 이르는 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대상도 아닌 입선 수준의 상일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씨가 이를 ‘대상’으로 부풀려 언론에 홍보했다는 것. 조직위 관계자는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우리 역시 (이 씨가) 대상이 아닌데도 대상으로 홍보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라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신청자들의 개인정보를 철저히 가리고 심사하기 때문에 결코 로비가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 씨의 선정에 대해서도 기존의 활동 경력만을 가지고 심사했을 뿐, 개인의 행적이나 신상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며 선정 과정에도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직위에 따르면 대통령상에 해당하는 대상의 경우는 정부포상 업무지침에 따라 수상자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확인한다. 그렇지만 이 씨는 정부포상에 해당되지 않는 입선 수준의 수상이라 이 씨의 신원이나 개인정보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은 없었다는 게 조직위의 추가 설명이다. 다만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오는 18일 예정된 조직위원회 운영회의에서 이 씨의 수상과 관련된 안건을 회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씨가 운영하는 연예기획사와 MOU를 체결했던 대학들도 이번 사건에 대해 놀랐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해당 MOU 체결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입장이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관련 학과가 많은 대학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대형 연예기획사와의 MOU 체결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따라서 중소 연예기획사와의 MOU 체결을 통해 재학생들에게 오디션 참여 등 기회를 꾸준히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다양한 중소 연예기획사들과의 산학협력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다만 이 씨가 소속 연습생을 상대로 성 로비를 강요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은 해당 대학의 재학생들도 비슷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검찰은 현재까지 이 씨가 실제 성 로비를 한 정황은 밝혀내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성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이 씨가 피해자인 A 씨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는 동안 소속 연예인인 신 씨가 직접 옷을 벗고 시범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이 씨가 신 씨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성 로비를 제공해 온 게 아니냐는 의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당초 이번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이 씨에 대해 성폭력 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했다. 그러나 검찰은 사실 관계를 파악했을 때 강요 혐의가 적용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이 씨가 이전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기획사 연습생을 성추행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피해자들이 더 있는지 여부를 중점적으로 수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 씨는 “상황이 과장된 것”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으며, 방조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된 아이돌 멤버 신 씨 역시 “같은 멤버가 될 A 씨와 함께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