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 네스빗
20세기 초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 중 하나였던 이날 밤의 살인극의 범인은 해리 켄달 쏘. 수천만 달러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였다. 처참하게 죽은 사람은 스탠포드 화이트. 뉴욕 사교계의 유명인이자 건축가였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든 일의 원인은 에블린 네스빗. 쏘의 아내이자 화이트의 옛 연인이었던 그녀는, 어쩌면 그날 밤 사건의 가장 비극적인 피해자였다.
에블린은 1884년에 피츠버그 근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윈필드는 변호사였지만, 이렇다 할 야심이나 돈 버는 재주는 없었다. 그가 오로지 관심을 보인 대상은 딸 에블린이었고, 에블린은 어릴 적부터 무엇인가를 성취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윈필드는 딸의 지적인 면을 키워주기 위해 집 안에 작은 라이브러리를 꾸렸고, 에블린이 춤과 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였지만 레슨을 받게 해주었다.
하지만 에블린이 11세 때 아버지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무일푼이 되었고, 집과 모든 가재도구를 경매에 내놓아야 했다. 친척과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이곳저곳 전전하며 살아가던 엄마와 에블린 그리고 남동생 하워드는 필라델피아로 이주했고, 세 가족은 백화점 옷감 판매원으로 일했다.
이때 14세였던 에블린을 한 손님이 눈여겨 보았다. 그는 화가였고, 에블린의 엄마에게 딸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간청했다. 아직 어린 딸이 낯선 사람 앞에 선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지만, 다행히 화가는 여성이었고 그렇게 에블린은 돈을 벌게 되었으며 얼마 있지 않아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모델이 되었다.
에블린 남편 해리 켄달 쏘는 아내를 타락시킨 스탠포드 화이트를 처단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다.
이때 그는 아버지뻘인 스탠포드 화이트를 소개 받는다. 건축가이자 사교계 인사였으며 바람둥이었던 그는 46세, 에블린은 17세였다. 그는 처음엔 마치 아버지처럼 다가와, 에블린의 가족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곧 본심을 드러냈다. 뉴욕에 소유한 호화 아파트의 이른바 ‘거울 방’으로 에블린을 유혹했다. 에블린은 화이트와 많은 샴페인을 마셨고, 정신을 차렸을 땐 나체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옆엔 당연히 화이트가 있었다.
이후 에블린은 수많은 남자들과 만났고, 그들 중 한 명은 해리 켄달 쏘였다. 피츠버그 석탄 재벌의 아들로 4000만 달러의 상속자였던 그는 무모하고 자기 탐닉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며 어릴 적부터 정신 불안에 시달렸다. 그가 우연히 연극 무대에서 에블린의 모습을 본 후에 집착은 시작되었고, 측근의 부탁을 통해 만나게 되었으며, 결국 연인이 되어 파리 여행 때 프러포즈를 했다.
에블린은 거절했다. 해리가 여성의 순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결벽주의자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거절에도 쏘는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했고, 이에 에블린은 과거 화이트와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쏘는 그 모든 상황을 디테일하게 물었고,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눈물을 흘리며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행선지는 오스트리아. 어느 고성에 에블린을 가둔 쏘는 2주 동안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한 뒤 미안하다며 울면서 사과했다. 당시 모르핀에 절어 살았던 그는, 사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에블린은 스탠포드 화이트에 의해 처녀성을 잃었다.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906년 6월 5일, 에블린과 쏘 부부는 유럽 여행을 가기 위해 뉴욕에 잠시 들렀다. 그들은 호화 여객선을 타기 전에 뉴욕에 하루 묵으며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어느 카페에 들렀을 때, 쏘는 스탠포드 화이트를 목격했다. 그도 공연에 올 거라는 생각을 한 쏘는, 바짝 긴장했다. 더운 날씨 속에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 옥상 극장에선 공연이 한창이었다. 후반부로 접어들 즈음, 화이트가 나타나 자신의 테이블에 앉았다. 클라이맥스 곡인 ‘I Could Love A Million Girls’가 흐를 때, 쏘는 화이트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1미터 앞에서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총알은 얼굴과 두개골에 명중했고 화이트는 즉사했다.
쏘는 그 광경을 보며 계속 서 있었고 이렇게 소리쳤다. “이 자가 내 아내를 망쳐 버린 놈이라 죽인 거야! 자업자득이라고! 이 자는 한 여자를 이용한 후에 버렸어!” 그리고 이 사건은 한동안 미국 사회를 뒤흔들게 된다. 그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진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