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가계부채 대책을 정면 비판하면서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는 일부 중복되는 업무가 존재하지만 평소에는 기능과 역할이 대부분 분명하게 나뉘어 있어 서로 영역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결정 등을 통해 기본 기능인 통화량과 물가 조절에 집중하고 금융위는 인허가와 제도개편 등 금융정책에 업무의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통상 한국은행을 ‘통화당국’으로, 금융위원회를 ‘금융당국’으로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국가적 경제 이슈가 발생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책임 소재가 걸린 문제일 경우 양측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며 갈등을 빚기도 한다.
최근 금융권과 관가를 달구고 있는 핫이슈는 ‘가계부채 해결’이다. 1300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에도 여전히 급증세인 가계부채를 이대로 두면 결국 국가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인데, 이를 두고 한은과 금융위가 공방전을 벌이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눈에 띄는 대목은 보수적이고 신중하기로 소문난 한은이 먼저, 그것도 이주열 총재가 직접 포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이 총재는 지난 11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가 끝난 후 열린 언론간담회에서 “가계부채 문제는 감독당국에서 대단히 유의 깊게 보고 관계부처끼리 협의 중이다”면서 “정부 당국이 가계부채 증가세를 억제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내놨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금융위원회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 총재는 별도로 일부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도 “가계부채 증가세가 생각보다 높아 그 문제를 (한은 내부에서) 열띠게 논의 중”이라며 “한은뿐 아니라 감독당국도 가볍게 여길 문제는 아니어서 관계부처 간 협의를 통한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은 총재가 정책 파트너인 금융위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 자체도 매우 이례적인 일인 데다 “정책이 효과가 없다”고 언급한 것은 에둘러 말하기에 능한 이 총재의 평소 언행과 판이한 모습이라는 게 금융권의 평가다.
가계부채 대책은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직접 챙기는 사안으로 금융위는 이 총재의 발언에 대해 적극 반박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게다가 이 총재가 지목한 가계부채 대책은 금융위나 기획재정부뿐 아니라 한은까지 참여해 마련한 관계부처 합동대책이다. 은행권에는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으로 적용되고 있는 이 정책은 지난 5월부터 전국으로 확대 실시 중인데 불과 3개월 만에 이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당황한 쪽은 금융위다. 정책 마련 과정에 기재부는 물론 한은도 관여했지만 사실상 은행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다보니 주무부처는 금융위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직접 설명에 나설 정도로 챙기는 사안이니만큼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금융위는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이 총재의 발언이 있은 다음 날인 12일 금융위는 예정에 없던 자료를 배포하며 불끄기에 들어갔다. ‘가계부채 정책 효과와 향후 대응 계획에 대한 보도 참고자료’라는 긴 제목의 자료의 뼈대는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이 적용된 후 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 증가세가 꺾이고 질적 구조도 개선됐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 총재의 발언과 달리 가계부채 대책은 가시적 성과가 있다”고 반박한 셈이다.
금융권은 이 총재가 난데없이 가계부채 문제를 당국 간 논란거리로 끌고 나온 것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당장 대출영업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데다 이 총재의 발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가계부채 문제의 책임 소재를 가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이유에서다.
금융권은 우선 ‘가계부채 관리협의체’의 가동이 완전히 중단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이 협의체는 지난해 3월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후보자 시절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만든 것으로, ‘가계부채 TF’라고도 불린다.
문제는 이 협의체가 지난 2월 회의를 연 뒤 6개월째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는 동안 가계부채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올해 1∼6월 가계부채 증가액은 60조 원을 넘어서 한은이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93년 이후 사상 최대 규모(상반기 기준)를 기록했다.
금융권은 통계 작성 당사자인 한은이 가계부채 급증세에 놀라 먼저 움직인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는다. 특히 지난 6월 기준금리를 1.25%로 인하한 한은으로서는 가계부채 증가세에 기름을 부었다는 비판을 우려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대출이 늘고 있는데 금리를 내림으로써 빚 늘리기를 부채질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 총재가 “협의를 통한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 대목도 주목받고 있다. 관련 정부부처가 다시 모여 더 효율적인 대책을 내놓자고 제안한 셈으로, 향후 가계부채 관리에 관한 주도권을 한은이 쥐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한은은 이 총재의 발언이 있기 전 이미 금융통화위원들이 군불을 지핀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았다. 7월 금통위에서는 “최근 도입된 규제들의 실효성을 평가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대외부문 조기경보시스템뿐 아니라 가계부채 등 대내 부문을 포함한 종합적인 조기경보시스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발언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금융위는 이 같은 한은의 행보에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특히 이 총재의 발언이 그간의 정책방향과 다소 맞지 않다는 반응이 나온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주열 총재가)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라면서 “기준금리를 인하해놓은 마당에 통계를 뽑아보니 가계 빚 증가세가 너무 가팔라서 부담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까지 내놓은 가계부채 대책은 변동금리 대출을 고정금리 대출로 바꾸는 등 대부분 양이 아니라 질을 관리하는 방식이었다”면서 “이를 모를 리 없는 이 총재가 양을 문제 삼은 것은 다소 의외”라고 밝혔다.
이 총재가 정작 가장 최근 통계인 7월 가계대출 증가액을 언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금융당국 다른 관계자는 “기준금리가 인하된 7월의 가계대출 증가 규모가 6월에 비해 감소했다”면서 “정책이 시장에서 먹히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한은 측이 예고한 추가 대책에 관해서는 금융위가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한은은 물론이고 기재부 등 관련 부처들과 여러 채널을 통해 상시적으로 대책을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면서 “제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