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제 좀 살 만하니까 집안싸움을 하고 있는 꼴이다.” 한 친박 의원은 전당대회 후 친박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친박은 정권 초반부터 수적으로 비박계에 밀리며 2014년 전당대회 등 주요 선거에서 계속 졌다. 그리고 4월 총선에선 공천파동을 일으키며 패배의 원흉이 됐다. 그런데 이번 전대에서 친박의 저력을 확인했고, 또 이로 인해 다시 당을 장악하게 됐다. 이제 하나로 뭉쳐 정권 재창출에 나서야 할 판인데 대선 후보를 놓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친박은 8·9 전당대회를 통해 당 대표를 배출했다. 또 5명을 뽑는 최고위원 선거에서도 4명이 당선됐다. 특히 조원진·이장우 최고위원은 대표적인 ‘강성’ 친박이다. 최고위원회 당연직 멤버로 포함되는 정진석 원내대표와 김광림 정책위의장도 범친박계로 분류된다. 최고위원 8명 중 7명이 친박으로, 이쯤되면 새누리당은 ‘친박 천하’인 셈이다. 비박 진영에서 ‘당이 청와대 이중대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친박이 당 주도권을 쥐면서 한동안 주춤했던 ‘반기문 대망론’도 다시 주목을 받았다. 친박계가 반 총장을 염두에 둔 대권 플랜을 수립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은 아니다. 친박 핵심부가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총선 공천에 개입하고, 전당대회 승리를 위해 움직였던 것은 대선 경선과 깊숙한 연관이 있다. 또 그 중심엔 반 총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반 총장을 ‘옹립’하는 수순으로 가기 위해 일단 당부터 손에 넣으려 했다는 얘기다.
물론 여권에선 반 총장 비토 기류도 적지 않았다. 김무성 대표를 미는 비박은 물론 친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친박 의원은 “반 총장이 과연 본선 경쟁력을 갖췄는지 의문을 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안철수처럼 신드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다른 인사들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적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마땅한 친박 후보가 없다는 ‘현실론’ 앞에 이러한 견해는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당대회 후 ‘반기문 대안론’이 친박 의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정현 당 대표가 제안한 ‘슈퍼스타 K’ 방식의 대선 경선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여진다. 이는 출마한 대선 후보들이 매주 정책 등을 놓고 겨뤄 한 명씩 탈락하고, 마지막으로 두 명만 남겨두고 유권자들로 하여금 최종 후보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반 총장의 ‘무혈입성’ 밑그림을 그려온 특정 친박 인사들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청와대도 이 대표가 언급한 ‘슈퍼스타 K’ 경선에 대해 떨떠름해하는 반응이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백그라운드 없이, 원점에서부터 경쟁을 하자는 게 슈퍼스타 K 방식이다. 이럴 거였으면 총선 공천이나 전당대회에서 무리를 하면서까지 친박 인사를 발탁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또 (반 총장을 삼고초려한) 일련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간 것 아니냐. 슈퍼스타 K 방식은 이 대표 개인 생각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슈퍼스타 K 경선을 밀어붙일 경우 청와대와 마찰을 빚을 수도 있음을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친박 일각에선 ‘반기문 대항마’로 오세훈 전 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오 전 시장은 지난 4월 총선에서 패배했고, 8월 전당대회에선 비박계 후보 주호영 의원을 지원 사격했다가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나 몇몇 친박 의원들은 오 전 시장이 본격 대선에 뛰어들 경우 여권 ‘집토끼’인 보수층에서 반 총장보다 우위를 점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앞서의 친박 의원 말이다.
“오 전 시장의 경우 토론능력, 대중성 등은 이미 검증이 된 정치인이다. 무상급식으로 직을 던지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유력한 잠룡이었다. 또 무상급식과 관련해서도 보수 진영에선 오 전 시장을 응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새누리당 내 조직이 없다는 게 최대 약점이지만 이 역시 친박에서 밀어준다면 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아무것도 드러난 게 없는 반 총장보다는 훨씬 매력적이고 안전한 카드다.”
일각에선 이 대표의 슈퍼스타 K가 오 전 시장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윤호석 평론가는 “슈퍼스타 K는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외모나 언변 등도 결과를 좌우한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여권에선 오 전 시장이나 남경필 경기지사가 유리할 수 있다. 반면, 반 총장에겐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이 기댈 곳은 친박 조직뿐인데 이 방식은 이런 요소가 개입될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반 총장 대안을 찾자는 친박 관계자들은 “반 총장을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반 총장 경쟁력과는 별개로 반 총장이 출마를 안 하거나 또는 하더라도 ‘로열티’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사이가 틀어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한 원로 인사는 “반 총장이 상수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세훈 전 시장, 남경필 지사, 황교안 총리 등 여러 후보군이 있지 않느냐. 문호를 열어 치열하게 예선을 치러야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차기를 둘러싼 친박 내 파워게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반 총장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쪽에 맞서 오 전 시장 등 다른 후보를 내세우는 쪽이 전대를 계기로 본격 움직임에 나선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 친박 전략가는 “그동안 반 총장 띄우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인사들이 이정현 대표 당선을 계기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반 총장이 영남과 충청을 합한, ‘충청 대망론’에 기대고 있었다면 오 전 시장 등은 ‘수도권 필승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최대 표밭인 수도권 출신이 후보로 나설 경우 영남표와 결합해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의 친박 전략가는 “경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집안싸움이 심해지면 결국 비박만 좋은 일 아니겠느냐. 반 총장이 지지율 1위이긴 하지만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진 못하기 때문에 대안이 나오는 것 같다. 누가 되든 확실한 친박 후보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