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로 해외여행이 잦은 H 씨(남·43)는 해외에서 심심풀이로 카지노에 출입하면서 도박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가끔 따는 재미에 카지노뿐만 아니라 경마, 경륜장에도 자주 가다 보니 4년 전부터는 도박 빚이 생겨 집에 거짓말을 하고 도박자금을 마련했다. 빚이 점점 늘었지만 그럴수록 도박을 해야만 빚을 한방에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지 못했다. 결국 회사 돈으로 도박을 하다 모두 잃고 회사까지 그만두고 나서야 가족들의 권유로 병원을 찾아 치료 중이다.
이처럼 도박으로 돈은 물론 직장, 가정을 잃고 파멸에 이르는 도박중독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많게 봐서는 전체 성인 인구의 9%, 즉 3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도박중독 환자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성격적인 특징은 두 가지. 국립서울병원 정신위생과 이태경 과장은 “남성들의 경우 경쟁적이고, 모험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타입인 자극 추구형 성격이 많고, 반대로 여성들은 내성적이고 대인관계가 적은 사람들이 현실도피의 한 방편으로 도박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 등의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도박도 일단 중독상태에 빠지면 내성이 생긴다. 처음에는 적은 액수를 걸고, 짧은 시간으로 충분했지만 점차 거는 돈의 액수가 많아지고 도박을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야만 성에 차는 것이다. 결국 빚이 점점 늘어나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더 본전 생각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또 한 가지는 금단증상이다. 어느 순간 도박 때문에 가정과 직장에서 문제가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절제하려는 결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금단증상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도박을 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지며 업무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다. 강북삼성병원 도박중독클리닉 신영철 교수는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도박장을 찾는 단계라면 아무리 마음속으로는 도박을 안 하고 싶어도 의지만으로는 조절이 어렵다”며 “이때는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도박중독은 의지대로 언제든 끊을 수 있는 잘못된 습관이 아닌 대뇌의 질환으로 한번 빠지면 스스로 헤어나기가 어렵다”는 게 신영철 교수의 설명.
의학용어로는 도박중독을 ‘병적도박’으로 부른다. 충동조절장애의 일종으로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본다. 대뇌 속의 변연계라는 부분에 도파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이 불균형을 이룰 때 도박중독에 빠지게 된다.
도박중독으로 병원을 찾으면 항우울제 같은 약물치료, 중독자들의 믿음과 행동을 교정하는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해 치료효과를 높인다. 특히 같은 중독자들이 모여 집단치료를 하면 효과적이다. 강북삼성병원 도박중독 클리닉(www.dobakclinic.com)의 경우 현재 주 1회씩 8주간의 집단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국립서울병원과 경기도 이천의 성안드레아병원에서도 체계적인 도박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치료를 시작하더라도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재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발했다고 서로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도박중독이 어떤 질환인지 충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박중독 환자나 가족을 위한 각종 모임의 문을 두드려서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병원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와 가족이 함께 모임에 참여하면 좋지만, 만약 환자가 꺼릴 때는 가족이 먼저 이런 모임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도 좋다.
각종 도박중독이나 주식, 로또중독 등 사행성 중독의 경우 도박을 끊고 싶어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한국단도박모임(02-521-2141)이 활동하고 있다. 홈페이지(www.dandobak. co.kr)에 들어가면 각 지방별 모임장소 및 연락처,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강원랜드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만든 한국도박치유센터(080-7575-535)에서는 무료 상담은 물론 전문병원과 연계해 3개월간 월 200만 원 한도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외에도 도박중독자가족모임(02-522-8483), KRA유캔센터(한국습관성도박연구센터·031-622-5999), 경륜운동본부 경륜건전클리닉(02-2240-5361) 등이 있다.
나도 혹시 도박중독?
아래의 20개 항목 중에서 최소 7개 이상의 항목에 “Yes”라고 체크하는 경우에는 도박중독일 가능성이 크다. 전문 상담기관이나 병원을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고, 필요하다면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4~6개 항목에 “Yes”라고 대답했다면 도박중독은 아니더라도 문제가 있는 타입이다. (자료 제공=한국 단도박회)
1. 도박으로 인해 결근이나 지각을 한 적이 있다.( )
2. 도박으로 인해 가정생활이 불행해졌다.( )
3. 도박으로 인해 명성이 훼손됐다.( )
4. 도박한 후에 후회한 적이 있다.( )
5. 부채 상환 또는 재정적인 문제 해결에 사용할 돈으로 도박을 한 적이 있다.( )
6. 도박으로 인해 자신의 야망이 좌절되거나 능력이 줄었다.( )
7. 돈을 잃었을 때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도박장에 돌아가서 잃은 돈을 되찾아야 한다고 느낀 적이 있다.( )
8. 돈을 땄을 때 더 많은 돈을 따기 위해 도박장을 다시 찾겠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
9. 종종 도박에 최후의 일원까지도 모두 건다.( )
10.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돈을 빌린 적이 있다.( )
11.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돈이 되는 어떤 것을 판 적이 있다.( )
12. 도박자금으로 쓰기 위해 생활비에 쓰는 것조차 아깝게 여긴 적이 있다.( )
13. 도박으로 인해 가정의 여러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
14. 생각한 시간보다 더 오래 도박을 한 적이 있다.( )
15. 근심이나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박을 한 적이 있다.( )
16.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을 행하거나 고려한 적이 있다.( )
17. 도박으로 인해 잠을 들기가 어렵다.( )
18. 부부싸움, 의견대립, 실망, 좌절 등으로 도박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
19. 몇 시간의 도박으로 한 밑천 잡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
20. 자신의 도박행위로 인해 자살, 자해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
송은숙 건강전문프리랜서
도움말=강북삼성병원 도박중독클리닉 신영철 교수, 국립서울병원 정신위생과 이태경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