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 네스빗은 당시 남자를 파멸로 이끈다는 의미인 ‘아메리칸 이브’라는 닉네임으로 통용됐다.
해리 켄달 쏘는 현장에서 소리쳤고, 청중은 이것 역시 그날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화이트가 진짜로 죽었음을 알게 되었고, 산산이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우뚝 선 쏘는 머리 위로 총을 치켜 든 상태였다. 이후 그는 군중을 헤치고 걸어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에블린 네스빗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는 아내의 질문에 쏘는 대답했다. “난 당신의 생명을 구할 행동을 한 거야.”
몇 년 뒤 네스빗은 당시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정신과 육체 모두 완전히 무감각했던 시간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몇 시간 동안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사건 다음 날인 6월 6일 아침, 신문 가판대는 ‘화이트 살인 사건’에 대한 뉴스로 뒤덮였다. 당시 미국은 옐로 저널리즘의 전성기였다. 뉴스에서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눈물의 자매들’(Sob Sisters)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기사는 드라마에 가까웠다. 그들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를 만들어냈고, 피고인인 쏘에 대해 무척 관대했다. 그들은 해리 켄달 쏘의 정신 불안과 약물 중독과 폭력적 성향엔 침묵했고, 대신 그가 ‘여성을 보호하는 남성’이라며 영웅화했다.
그러면서 여성인 네스빗을 공격했다. ‘어느 여성의 영혼에 대한 해부’라는 글엔 이런 대목마저 있었다. “네스빗은 처음엔 화이트에게 자기 자신을 팔았고 그 다음에 쏘에게 팔았다.” 혹은 미사여구로 네스빗의 연약함을 강조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아름다움은 파멸의 원인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처럼 악마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갔다.”
기사의 선정성이 도를 넘어서자 기독교 단체들이 언론 검열을 요구하며 일어섰고, 루즈벨트 대통령마저 개입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이런 기사들을 막을 순 없었다. 사건 일주일 후에 토머스 에디슨은 <루프탑 머더>라는 단편 영화를 내놓으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당시 ‘화이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한편 죽은 자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스탠포드 화이트는 제대로 된 건축가가 아니라 제멋대로인 예술가였으며, 이곳저곳에서 베낀 것으로 집을 장식하는 사기꾼이었다는 내용이 타블로이드에 실렸다.
드디어 재판이 열렸다. 쏘의 어머니는 아들이 정신 이상자로 낙인찍히길 원치 않았다. 사실 쏘의 가문엔 유전적인 정신 질환이 있었지만, 이 사실이 밝혀지길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판정이 나면 감옥에 가야 했다. 해결책은 일시적 정신 이상으로 인한 돌발 행위로 몰고 가는 것이었고, 무려 50만 달러를 들여 정신과 전문의들을 섭외해 소견서를 만들었다. 한편 네스빗은 법정에서 쏘에게 호의적인 증언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리고 증언대에 서서 자신이 화이트에게 어떻게 강간당했으며 처녀성을 잃었는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사악한 화이트의 가련한 희생자이며, 화이트를 죽인 쏘는 정의로운 기사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 사법 사상 최초로 배심원들이 대중의 관심을 피해 격리되어야 할 정도로 재판은 큰 관심을 끌었던 전쟁터였다. 1907년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47시간의 숙의 끝에 7명은 유죄, 5명은 무죄 의견을 내놓았다. 1908년에 재심이 이뤄졌고 법원은 그의 정신 이상을 인정해 평생 정신병원에서 지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이제 쏘는 자신이 제 정신이라는 걸 증명해야 했고, 쏘의 어머니는 법무 팀을 꾸려 몇 년에 걸쳐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결국 1913년 쏘는 병원을 탈출해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지만 다시 미국으로 인도됐고, 1915년에 정상 판결을 받아 가석방됐다.
에블린 네스빗과 아들 러셀
쏘가 병원에서 나오자 네스빗은 즉시 이혼했으며 다음 해 댄서인 잭 클리포드와 재혼했다. 하지만 당시 네스빗은 남자를 파멸로 이끈다는 의미인 ‘아메리칸 이브’라는 닉네임으로 통용되었고, 클리포드는 아내의 유명세를 견디지 못해 곧 별거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는 금주법 시대에 주류 밀매를 했고, 알코올과 모르핀에 중독되었으며, 싸구려 무대에서 춤을 추며 살아갔다.
한편 전 남편인 쏘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네스빗을 감시했다. 이것은 한때 네스빗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기 때문. 자신 때문에 험난한 인생을 살게 된 전처에 대한 배려였을까? 그들은 1926년에 재회했지만 잠깐의 해후였을 뿐 재결합하진 않았다. 1947년에 쏘는 세상을 떠나며 1만 달러의 유산을 네스빗에게 남겼다. 네스빗은 1967년에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여사는 1908년에 <빨간 머리 앤>을 쓸 때 에블린 네스빗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영감을 얻으며 참조했다고 한다. 네스빗의 삶에 대해선 <걸 인 더 레드 벨벳 스윙>(1955)이라는 영화가 나왔고 네스빗 자신도 1만 달러를 받고 자문으로 참여했지만, 영화는 사실의 날조로 가득 차 있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