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이 삼성금융지주 설립을 위해 금융당국와 협의를 시작했다. 사진은 삼성생명이 있는 삼성 서초타운 전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18일 삼성생명은 임시이사회를 열어 삼성화재가 가진 삼성증권 지분 전량(8.02%)을 2343억 원에 매입하는 안을 의결했다. 같은 날 삼성화재도 이사회를 열고 지분 매각 안건을 통과시켰다.
주식시장 마감 직후인 오후 4시에 개최된 이날 이사회를 앞두고 증권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여의도를 중심으로 이사회 안건의 구체적인 내용이 사전에 퍼져나가면서 증권사들은 부랴부랴 관련 보고서를 만드느라 부산을 떨었고, 투자자들은 삼성그룹 금융계열사 주식을 사야 할지 팔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삼성생명의 몸집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 2300억 원대 지분 매입을 두고 시장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이번 주식 인수가 삼성그룹 전체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2013년부터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전기·삼성중공업 등이 보유하고 있던 금융 계열사 지분을 삼성생명으로 옮기며 금융계열사와 산업계열사의 지배구조를 이원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삼성생명은 산업계열사가 보유 중이던 삼성카드 지분 전량(6.38%)을 매입해 지분율을 71.86%로 끌어올렸고, 이듬해에는 삼성자산운용을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삼성화재와 삼성증권의 경우 각각 14.98%와 11.14%의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삼성이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중간지주회사를 설립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하지만 삼성이 이후 1년 넘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 이 예측은 금융계열사 매각설로 변한다.
삼성생명이 금융지주회사가 되려면 금융지주회사법상 자회사 지분 보유 최저한도인 ‘상장사 30% 이상, 비상장사 50% 이상, 최대주주’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삼성화재와 삼성증권은 이 기준에 한참 모자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와중에 삼성카드마저 서초동 사옥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삼성카드·삼성증권 매각설’에 더욱 힘이 실렸다.
하지만 이번 이사회를 계기로 삼성의 향후 행보는 확실해졌다는 평가다. 삼성증권은 물론 향후 삼성화재 지분율까지 높여 요건을 맞춘 뒤 삼성생명 중심의 금융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는 그림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는 삼성생명이 금융당국과 지주회사 설립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삼성은 금융지주회사 전환 계획을 금융위원회에 알렸고, 요건 충족을 위해 7년간의 유예기간을 달라는 요청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7년은 현행법상 허용 가능한 최대 기간이다.
당장 삼성증권과 삼성화재 지분을 사들이면 30% 요건을 맞출 수 있는데도 삼성이 시간을 7년씩이나 요청한 이유는 뭘까. 첫째는 지분 추가 매입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지난 수십 년간 삼성그룹 지배구조에서 핵심 역할을 해온 삼성생명의 복잡한 지분 보유 내역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수조 원이 소요될 삼성금융지주체제가 마무리돼야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이 안정적으로 구축될 수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현재 지분율이 14.98%인 삼성화재의 경우 15%를 추가로 매입해야 한다. 삼성화재의 주가가 약 27만 원인 점을 감안하면 약 1조 9000억 원의 자금이 소요된다. 지분율 11.14%인 삼성증권의 경우 지난 18일 결정한 8.02% 지분 매입에 2343억 원이 필요하고, 10.8%를 더 사서 30%를 맞추려면 추가로 약 3000억 원을 투입해야 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삼성증권과 삼성카드의 경우 두 회사가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들이 있는데 이들 회사는 삼성생명이 지주회사로 전환하면 손자회사가 돼 100% 지분을 소유해야 한다.
삼성증권이 16.67%의 지분을 가진 삼성벤처투자의 경우 추가로 83.3%를 매입하려면 560억 원가량이 필요하고, 삼성카드 자회사 올앳에도 100억 원가량을 더 투입해야 한다. 이들 지분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모두 합치면 약 2조 3000억 원가량이 된다.
사실 삼성증권의 막강한 자금동원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 금액은 큰 무리가 아니다. 삼성생명의 올해 상반기 말 기준 현금성자산은 1조 6780억 원으로 6000억 원가량을 추가로 조달하면 끝낼 수 있는 작업이다.
문제는 오히려 내다 팔아야 하는 주식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금융지주회사는 비금융 계열사 지분을, 사업지주회사는 금융계열사 지분을 5% 이상 갖고 있을 수 없다. LG그룹이 과거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면서 LG증권 등 금융계열사를 모두 처분하고 금융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삼성생명 역시 금융지주회사가 되려면 비금융 계열사 지분율을 5% 미만으로 낮춰야 한다. 주식을 내다팔아 현금화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우선 삼성생명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회사다. 그만큼 주요 계열사 지분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엉뚱한 곳에서 사들일 경우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가 통째로 흔들릴 위험이 있다.
삼성생명은 현재 삼성전자 7.5%를 필두로 에스원(5.34%), 호텔신라(7.3%), 삼성경제연구소(14.8%), 삼성중공업(3.38%) 등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이 지분들이 ‘남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이건희 회장 일가의 그룹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될 수 있다. 지난해 삼성물산 지분 7.12% 갖고 있던 엘리엇이 그룹 전체를 흔들었던 악몽이 재현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위해 삼성생명은 이 지분들을 그룹 내 사업지주회사 후보인 삼성물산에 넘길 가능성이 높은데, 액수가 너무 크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5% 룰에 맞춘다고 가정할 경우 우선 삼성전자 지분 2.5%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자금은 5조 9000억 원에 달한다. 또 에스원 지분은 0.34%는 약 130억 원, 호텔신라 지분 2.3%는 약 560억 원이 필요하다. 삼성경제연구소 지분 9.8%는 89억 원에 달한다. 삼성물산이 사들여야 하는 이들 4개사 지분가치만 무려 6조 원에 이른다. 지난 6월 말 기준 삼성물산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2조 6000억 원 수준이다. 갖고 있는 자금을 모두 쏟아 부어도 필요한 자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최근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됐다는 점도 골칫거리다. 현행 보험업법은 보험사가 보유할 수 있는 계열사 주식이나 채권 규모를 총자산의 3%까지로 규제하고 있는데, 3%를 계산하는 기준을 ‘취득가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취득가격 대신 ‘시가’를 기준으로 하도록 했다. 만약 이 법이 통과될 경우 삼성생명이 매각해야 하는 계열사 주식은 6조 원보다 훨씬 커진다.
지난 6월 말 기준 삼성생명의 자산 규모는 약 200조 원에 달한다. 현재 기준인 3%는 약 6조 원으로 문제가 없지만 시가로 바뀌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사들인 것은 1970년대로, 두 회사 모두 상장도 되기 전의 일이다. 이를 현재의 삼성전자 시가인 주당 160만 원가량으로 바꿀 경우 ‘재앙’ 수준의 상황이 벌어진다.
사실상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전량을 처분해야 하고, 이를 삼성물산이 사들일 경우 동원해야 하는 자금은 무려 18조 원에 이른다.
이런 앞뒤 상황을 감안하면 삼성그룹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지배구조 재편 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법 개정과 관련한 물밑작업에 나설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금융당국과 지주회사 설립을 논의하면서 7년이라는 긴 시간의 유예를 요청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