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씨는 혼인관계증명서를 떼 직접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제출했다. 그는 “퇴사했기에 소득이 없는 데다 미혼인 것을 건강보험공단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직접 미혼인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전경.
피부양자 등록은 개인이 직접 해야 한다. 또 부모나 형제·자매의 피부양자로 편입하려는 남성 28세, 여성 25세 이상인 사람은 기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미혼임을 증명할 수 있는 혼인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다. 기혼이라면 당연히 배우자의 피부양자로 편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인관계증명은 사법부 소관인 탓에 민원인이 직접 서류를 구비해 공단에 제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소관 부처 간 정보 공유나 전산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아 국민 개개인이 일일이 자신의 상태를 증명해야 한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행정적으로 원활하지 않아 국민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으며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 정부는 ‘전자정부’를 시행하며 세계 3위의 전자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부처 간 행정 절차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국민들이 불편을 겪으면서 ‘세계 3위의 전자행정 시스템 구축’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삼열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자정부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국민이 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며 “사법부와 행정부를 막론하고 국민의 행정시스템 이용 개선을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공단은 해마다 건강보험료를 책정할 때도 고작 1년에 한 번 국세청에서 소득 자료를 받아 보험료를 책정하고 있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연초 건강보험료 재산정 기간에 국민들이 인상된 보험료를 한꺼번에 납부하느라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취업준비생이나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몸을 담는 인턴직이나 계약직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인턴직·계약직은 일의 특성상 일하는 기간이 짧지만 그 기간 동안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에 가입해야 하고, 기간이 만료돼 퇴사한 후에는 직장가입자로 가입돼 있는 가족의 피부양자로 직접 편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으로 지역가입자로 편성돼 보험료 부담이 훨씬 커지는 것은 물론 앞의 이 씨의 예처럼 독촉장을 받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 미혼자라면 혼인관계까지 증명해야 한다. 즉 직장을 잃은 미혼자는 가만히 있다가 ‘건보료 폭탄’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씨는 “계약이 만료돼 직장을 잃고 소득이 없어진 상황에서 건보료 폭탄을 감당하기 힘들다”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국민에게 직접 서류를 챙기고 제출하라는 행정절차는 분명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털어놨다. 건강보험공단 민원센터의 한 직원은 “피부양자 등록을 위해 미혼 증명을 하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자격요건으로 개인의 혼인 여부를 따지는 것에 대한 반발은 계속 있어왔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건강보험공단이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을 ‘기혼’이라는 이유로 형제·자매의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진정을 받아 공단에 제도 개선을 요구한 바 있다. 공단이 이혼한 사람은 미혼으로 간주하는 반면 사별한 사람은 기혼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단은 인권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사별이든 이혼이든 결혼 이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형제·자매의 피부양자가 될 수 없도록 규정을 강화했다. 국민들과 인권위가 개선하라고 요구한 제도를 오히려 강화한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이 혼인 적령기로 삼은 ‘남 28세, 여 25세’라는 기준도 일방적이다. 초혼 평균연령이 30세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지난 4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혼인이혼통계’에 따르면 남성 초혼 연령은 32.6세, 여성은 30세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은 “건강보험법 시행규칙과 공단 지침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고액 자산가 중 피부양자로 등록한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피부양 자격을 꼼꼼히 살피다 보니 여러 조건이 들어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