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회장은 지난 몇 달간 롯데그룹 비리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의 주요 수사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그룹 2인자’로 통할 만큼 이 부회장은 롯데그룹 자금과 계열사 경영에 전반적으로 관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왼쪽)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최측근으로 통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당초 검찰은 지난 25일 황각규 롯데쇼핑 사장을 소환 조사한 데 이어 26일 이 부회장을 불러 조사할 예정이었다. 이른바 ‘신동빈의 사람들’을 잇달아 소환 조사한 후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롯데그룹 오너 일가에 대한 수사로 이어나갈 방침이었다. 실제로 검찰 주변에서는 ‘신동빈 회장의 소환이 임박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자살로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검찰은 이 부회장의 자살이 알려진 직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며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고 명복을 빈다”며 “수사 일정의 재검토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 부회장과 관련해 “개인 비리 혐의는 전혀 없다”고 했다.
이 부회장의 자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롯데그룹은 물론 검찰과 재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남긴 유서에는 “어려운 시기에 먼저 가서 미안하다”,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다”는 등 결백함과 미안함, 오너에 대한 존경심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그룹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이 최근 검찰 수사와 부자간-형제간 등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그룹 이미지가 실추된 데 대해 가슴 아파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같은 점을 미뤄볼 때 평생 몸과 정열을 바친 회사와 오너가 어려움에 빠진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 이 부회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적지 않다.
롯데그룹은 “평생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롯데의 기틀을 마련하신 이인원 부회장님이 고인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심정”이라고 침통해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청렴결백한 분이었다”고 전했다. 다시 말해 윤리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과 회사 그리고 오너를 비도덕적이라고 몰아세우고 폄하한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롯데월드타워 상량식’에서 이인원 부회장(왼쪽 두번째)이 신동빈 회장 등과 함께 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재계 반응은 다르다. 검찰 수사가 자신을 거쳐 오너로 이어질 것이 확실시되는 만큼 관련 ‘팩트’를 쥐고 있기 때문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다. 재계 한 인사는 “신격호 총괄회장 때부터 신동빈 회장까지 2대에 걸쳐 오너의 최측근으로서 자금 관리를 해온 인물이 감정적인 선택을 했을 리 만무하다”며 “신동빈 회장의 검찰 소환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혹시라도 입을 열면 안 되는 뭔가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고인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정말 깨끗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며 “검찰이 장기간 털었는데도 뚜렷하게 나온 게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키를 쥔 사람이 소환을 앞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본인이 다 책임지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다른 대기업 임원은 “우리나라 재계 현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비통한 광경”이라며 “롯데그룹과 오너 입장에서는 마지막까지 가신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7~8월 신동주-신동빈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롯데그룹은 지배구조가 가장 복잡하고 투명하지 못한 재벌 중 하나로 거론돼왔다. 롯데는 또 숱한 인수합병(M&A)을 통해 단기간에 재계 5위까지 치솟을 만큼 급성장한 기업이다. 이러한 기업에서 이 부회장은 ‘2인자’ 별칭을 얻으며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부회장’ 직함을 가질 정도로 경영 최전선에 있었다.
이 부회장은 롯데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신 총괄회장의 최측근이었지만 경영권 다툼이 일어나자 신 총괄회장이 아닌 신동빈 회장 편에 섰기 때문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오랫동안 롯데쇼핑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지금의 롯데백화점·면세점을 만든 주역 중 한 명”이라며 “지방 백화점들을 M&A하는 데 성공하면서 롯데백화점을 성장시킨 공을 인정받아 신동빈 회장과 함께 M&A를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신동빈 회장에 더욱 매료된 듯하다”고 전했다. 지난 26일 신격호 총괄회장은 “안타까운 일이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이 부회장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부회장의 죽음에 대해서는 검찰조차 의아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장례 일정 등의 이유로 불가피하게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롯데 오너 일가 소환 일정만 조정될 뿐 롯데그룹 수사에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오너 일가에 대한 관련 자료와 증거를 이미 다수 확보한 상태이며 이 부회장의 죽음이 오너 일가 등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검찰 쪽 반응이다.
롯데그룹은 이 부회장의 장례를 그룹장으로 5일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장례가 끝난 이후 과연 롯데그룹과 검찰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